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을 때마다 심사 위원이 되어 본다. 역시나 대상은 '김춘영'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이유를 설명해야 되지만 어휘도 딸리고 생각도 모자라서 적지 못한다. 그들 사이에서 피아식별이 안되는 자가 그 사건을 제대로 말해 줄 수 있으며 그 사람이 구술자 김춘영이다. 그리고 뒤로 갈수록 집중도가 떨어져 '문제없는 하루'는 못 읽었다, 그래도 문제가 없으니까... 작가의 노트와 리뷰에서 소설 쓰기와 소설 읽기의 정의라고 할까,를 발견했고, 그들이 쓴 글에서 음, 이렇구나,로 나는 다음과 같다.  


피.아.식.별과 벗은 몸(김춘영) → 각자의 거푸집(거푸집의 형태)  관계에서의 공간, 헤아릴 수 없는 무서움과 부끄러움(스페이스 섹스올로지)  친절과 선의는 별일 아닌 것에서, 생활의 중력에서 벗어나는 용기, 이상과 일상 사이(빈티지 엽서) → 침묵과 의미의 공백에 들어 있는 욕망(눈먼 탐정)  삶과 죽음의 지점이 아니라 낯선 타국의 환승 정거장에 있다면, 그래서 모르는 밖의 세계를 계속 사용하고 접속해야 하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의식의 주체는 내가 되어야(돌아오는 밤).  


181쪽 김혜진 노트에서는 '소설 쓰는 일은 내 삶과 타인의 삶 사이에 반투명한 종이를 겹쳐 놓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타인의 삶은 내가 모르는 것이어서 힘껏 상상해야 겨우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속엔 내가 살아보지 못했던 삶과 한 번쯤 살아보고 싶었던 삶. 한때 갈망했던 삶과 단 한 번도 그려보지 못했던 삶이 모두 있다.'


227쪽 김미정 리뷰에서는 '소설 속 세계가 그러하듯 스스로가 완강하게 고집하는 것들을 내어놓지 않고는 이 세계를 여행할 수 없다. 거기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철저한 이방인 혹은 타인으로 경험한다. 익숙한 인식이나 감정의 회로를 이탈하며 헤매는 일은 미지에의 모험에 근사하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를 손에 넣는 일(소유)이라기보다, 자기(라고 여겨지는 것)을 내어 놓고, 약간의 불안과 설렘을 감각하며 낯선 세계의 윤곽을 더듬어보는 사건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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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은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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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한테 제일 중요한 게 뭡니까?"
(중략)
"군인한텐 첫째도 둘째도 이거예요. 피.아.식.별."
김춘영이 내 팔을 잡은 건 그때였을 것이다. 통창에 비친 김춘영의 모습을 보게 된 것도 그때였을 것이다. 사람들으느 남자가 던진 피아 식별의 그물에 순간적으로 갇힌 채 통창에 반사된 서로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31쪽, 최은미 ‘김춘영‘)

"그가 생의 어느 지점에 있는 기억의 습격을 받았는지" 김춘영의 머리가 하룻밤 사이에 새고 그녀의 몸에서 소변이 흘러나온다. 그 소변의 작은 강이 두 여성의 무릎을 적신다. 면담자와 구술자가 소변 강으로 연결된다. 구술자가 오랜 시간을 참아온 배뇨 욕구의 방출에 면담자가 산파 역할을 한다. 면담자는 이제 박선생이 아니라 박정윤이 되며, 피아 식별이 없어졌던 순간들. 탄광촌 내 여자 광부들이 압축기실에서 보낸 목욕 시간에 망을 보던 김춘영의 면담 기록이 환기된다. 상상하고 그려낼 필요가 없는 그냥 모두가 발가벗은 목욕 시간의 더운물이 이들을 하나로 만든다. 피, 아 구별이 없는 어울림의 장면에는 분명 소란스러운 웃음이 있었을 것이다. 김춘영과 박정윤 두사람이 각자의 차이를 넘어 한 밤의 여러 단계를 서로 서두르며 혹은 지연하며 목욕탕 모임에 참여하는 오독의 착각을 한다. (46쪽, ‘김춘영‘에 대한 최윤 리뷰 중)

얘, 너 말이야. 이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알아?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증오했고, 또 무엇을 잊지 못했는지. 어떤 미련을 갖고 살았는지 그걸 다 알아? 알면서도 이러는 거야? (74쪽, 강화길 ‘거푸집의 형태‘)

이모는 그 돈을 받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나를 사랑해줄 것 같았다. 그래, 사랑. 처음부터 나를 사랑한 적이 없기에. 그 돈을 받고서, 얼마든지 내게 돌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뭐였을까. 어떤 형태였을까. (중략) 어느 날 오랜 사랑이 확 뒤집어졌다. 그래, 그렇게 되었다. 마치 거푸집으로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마음이 내 가슴에 꽉 박혔다. 이모의 모든 선택이 우스워졌다. (중략) 이모, 나 그래서 파혼했어. 그 사람이 이모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싫어서. 한순간이나마 나와 이모를 자매 같다고 느꼈다는 것이 싫어서.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싫어졌어. (97-99쪽, 강화길, ‘거푸집의 형태‘)

배신으로 얼룩진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화자는 왜 짜릿한 승리의 예감에 사로 잡히는가. 어째서 이모와 자신이 "마치 꼭 거푸집으로 찍어낸 것처럼 똑같"다고 확신하는가. (중략) 이모는 조카의 삶에 자신의 삶을 덧대어 서사를 새로 만들어냈다. (중략) 화자만이 이모를 일방적으로 갈망한 것이 아니라, 이모 역시 화자의 삶을 욕망하고 동일시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그는 사랑의 전율로 진동한다. (114쪽, ‘거푸집의 형태‘에 대한 강지희 리뷰 중)

두 사람이 서로의 삶을 겹쳐놓는 방식에는 추락을 겪은 자들만 아는 결핍과 인정 욕구가 깃들어 있다. 서로를 탐내고 배반하며 잔혹하게 굴었지만, 그들은 결국 실패와 경멸을 공유하면서 구분 불가능한 신체가 된다. (중략) "못 생긴 게"라 중얼거리는 화자의 마지막 말은 자기혐오를 거쳐야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자의 뒤늦고 뜨거운 고백이다. (115-116쪽, ‘거푸집의 형태‘에 대한 강지희 리뷰 중)

어쩌면 은율은 그때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 아빠는 자기를 가지려고 딸의 팔다리가 찢어지거나 말거나 죽어라고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고. 실은 먼저 놓을 순간을 노리고 있는 거라고. 누군가 먼저 손을 놓으면 동시에 나자빠지겠지. 그리고 곰곰 생각했을 것이다. 누군가 먼저 손을 놓아버려 동시에 자빠진다면 쓰러지는 건 둘일까, 셋일까, 혹은 하나일까. 그후 이십 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모든 게 달라졌다. 심지어는 기억조차도. 더 심지어는 기억 속의 사실조차도. (128-129쪽, 김인숙,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유자는 사기꾼 최와 연애를 했던 게 아니었다. 그러나 곧이어 정말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아니라면 뭐였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 죽을 만큼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온몸이 뜨거운 프라이팬에 볶이는 듯 펄펄 뛰게 화가 나던 마음이 부끄러움과 괴로움으로 자글자글 끓었다. 그런데 부끄러운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부끄러운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없어서 자꾸 설명을 하려고 들게 되는 건가. (131쪽, 김인숙,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그런데도 무섭다고. (중략) 은율에게는 하지 않았으나 최에게는 했던 말. 그 사기꾼이 얼마나 모든 말을 다 들어주는 척했던지,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술술 나와서. 그래서 했던 말들. 그런데 나는 뭐가 그렇게 무서웠던 걸까. (중략) 최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만 썰라는 듯이. 그러곤 말했다. 누구나 무서워. 그리고 또 말했다. 나는 안 무서울 거라고 생각하니. 너는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하니. 나도 가끔은 정말 무서워. 나도 내가 정말 무서워. (143쪽, 김인숙, ‘스페이스 섹스올로지‘)

[스페이스 섹스올로지]는 한 개인이 수십 년간 축적해온, 삶에의 충실성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등을 망측하게도 영도零度 급락시킨다. 내부에 순응하려 오랜 시간 감추고 인내했던 의태擬態的 삶의 껍질을 뜯어내어 어리둥절하게 한다. 작가는 감각적인 문장으로 이를 교묘하게 자방낸다. 소설 속 주인공은 이를 모르는 채 다만 휘둘림으로써 이것의 존재를 드러낸다. 이러니 누군들 망측하지 않을까. 누군들 무섭지 않을까. 이 망측함과 무서움을 모른다면 외려 더 망측하고 슬프지 않을까. (152쪽, ‘스페이스 섹스올로지‘에 대한 구효서 리뷰 중)

이런 일련의 일을 통해 그녀는 친절과 선의가 완성되는 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음을 배웠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친절과 선의는 있는 그대로 주고 있는 그대로 받을 수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만 유효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오염되고 변질되고 공중분해되면서 자신 혹은 상대를 다치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누구나 쉽게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취약했고 위험했고 다루기 까다로웠다. (161쪽, 김혜진, ‘빈티지 엽서‘)

"그냥 별일도" 아닌 일을 그녀는 그만두기로 한다. 친절과 선의가 완성되는 조건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부적절해 보이는 일"이라는 걸 이제 알아서, 두 사람의 공통된 감정의 기반은 사라져버린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나 헤어지던 날 그는 엽서 뭉치 중에 하나를 기념으로 그녀에게 건넨다. 그건 그녀가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으로 그녀는 남편 앞에서 이렇게 해석한다. "우리가 지금과 같은 삶을 살게 된 건 사소한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에요. 그걸 알아야 해요." (중략) 이상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일상을 지키고 싶은 마음 사이. 그래서 이 해석할 수 없는 엽서는 버릴 수 없다. (187쪽, ‘빈티지 엽서‘에 대한 조정란 리뷰 중)

즉 갑작스러운 혹은 갑작스러워 보이는 불행은, 다른 종류의 불행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사실상 매일매일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이라는 것이다. (198쪽, 배수아, ‘눈먼 탐정‘)

소설 속 세계가 그러하듯 스스로가 완강하게 고집하는 것들을 내어놓지 않고는 이 세계를 여행할 수 없다. 거기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철저한 이방인 혹은 타인으로 경험한다. 익숙한 인식이나 감저으이 회로를 이탈하며 헤매는 일은 미지에의 모험에 근사하다. 그러하니 배수아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를 손에 넣는 일(소유)이라기보다, 자기(라고 여겨지는 것)를 내어놓고, 약간의 불안과 설렘을 감각하며 낯선 세계의 윤곽을 더듬어보는 사건에 가깝다. (227쪽, ‘눈먼 탐정‘에 대한 김미정 리뷰 중)

많은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문법을 지키지 않고 단어만 나열해도 뜻이 통한다. 빈틈은 표정이나 손짓으로 채울 수 있다. 나를 무뚝뚝하거나 퉁명스러운 사람으로 오해하면 어쩌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양한 언어와 국적과 성별이 뒤섞인 환승 터미널에서 나는 모국어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자유롭다. (244쪽, 최진명, ‘돌아오는 밤‘)

환승 비행장에서는 밖으로 나갈 수 없으므로 이곳의 겨울을 직접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는 이 ‘겨울을 경험하러 다시 오겠다고 다짐‘하며 ‘오로라 현상‘을 또 ‘검색‘한다. (중략) 이처럼 인간과 삶, 인간과 세계 사이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매개 기술에 의하여 주체의 기능이 퇴화하면서 개인은 "비행기와 터미널이라는 커다란 공간에 갇혀서 수화물처럼 옮겨지는 기분‘의 수동적 상태에 빠진다. (277쪽, ‘돌아오는 밤‘에 대한 김화영 리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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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글을 이리도 맛깔나게 쓰셨을까,로 번역했다. '맛깔나게' 단어 속에는 그 간의 저자의 희.노.애.락이 다 녹아있다. 희노애락의 큰 스펙트럼 안에 잘디잔 감정들을 아프게 느끼면서, 원문과 가장 유사한 번역을 위해 살아온 저자의 노고를 알 수 있다.  

어쩌면 잘 사는 삶이란, 나의 말을, 감정을, 행동을, 더 나아가 타인의 말들, 감정들, 행동들에 대해 번역을 잘 해야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로 해석할 수 있다 .

일방적이든, 주고 받든, 말과 감정과 행동은 서로 교차되어 또 다른 언어를 만들어 내고, 그 속에서 내게 맞는 말로 번역된다.

나의 수준과 기분에 따라 번역되는 말은 원문과는 동떨어질 수도 있고, 더 넘치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와 이해가 난무하여 다시 볼 수도 있고, 다시는 안 만나기도 한다.

심지어 나를 가장 잘 알고 가장 아끼는 엄마의 말조차 믿지 못하니, 애초부터 우리는 오역하며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을까, 오역의 크기를 줄여가는 게 삶의 과정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든다. 

특히, 

*90쪽 'I'm not defined by you(나는 당신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내가 한 말이 원문이니까, 나는 내가 정의하도록 하고, 굳이 의견을 듣고 싶다면 나를 가장 잘 알고, 나를 가장 아끼는 사람의 말을 듣자. 

*144쪽 '그냥 보고 싶어서 그래',를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감각을 놓치지 말자. 

*영화 대사가 떠오른다, '라면 먹을래요(라면 먹고 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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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하는 말들 - 황석희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북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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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계획대로 뚜벅뚜벅 가고 있으면서도 가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며 의도적으로 내 여정을 오역했다. 지쳐서, 다 놓고 쉬고 싶어서. (47쪽)

"난 왜 이렇게 못생겼어?"
엄마는 단호하게 답한다.
"넌 못 생기지 않았어."
어기는 엄마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그런 대답을 하리라.
"엄마는 내 엄마니까 그러는 거잖아."
엄마는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다.
"내 생각은 엄마라서 안 중요해?"
"안 중요해!"
(중략)
"엄마의 생각이니까 제일 중요한 거야. 내가 널 제일 잘 아니까."
하긴 그렇다. 엄마의 생각이니까 안 중요한 게 아니라 오히려 엄마의 생각이니까 제일 중요하다. 세상에서 나를 제일 잘 알고 제일 아끼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까. 어마만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의 말을 더 귀담아 들어야 하는 게 논리적으로 옳다. (88-89쪽)

"I‘m not defined by you."
(나는 당신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
(중략)
가령 어떤 사람이 나를 고구마라고 부른다 해서 내가 고구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나를 형편없는 번역가, 못난 부모라고 한다 해서 내가 형편없는 번역가나 못난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말엔 날 정의할 권위나 권리가 전혀 없다. (90-91쪽)

어떤 논리가 있든 어떤 사정이 있든 내 마음에 안 들면 틀렸다고 주장하는 태도. 이런 상황이 연출되면 대개는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 목소리 큰 사람과 싸우는 건 피곤한 일이거든. (157쪽)

자식들은, 특히나 궁하게 자란 자식들은 그저 부모의 인생이 불행했을 거라고 넘겨짚는다. 하지만 부모의 인생은 부모의 인생대로 희로애락이 있었을 거다. 어떻게 나는 그 시절을 한번 물어볼 생각도 않고 당신의 불행을 멋대로 단정했을까. 자고로 번역가라면 원문을 제대로 확인하려는 노력은 기울었어야 했다. (167-168쪽)

반복된 농담이 사회적 인식을 형성하는 과정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174쪽)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의 행동을 번역하다 보면 이런 오역을 저지르기 쉽다. 마치 영어 번역을 해야 하는데 일어 사전을 들고 번역하는 것과 같다. 아이의 말과 행동을 번역할 땐 어른 사전을 잠시 치우고 아이 사전을 펼쳐야 한다. (215쪽)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 아닌 경우가 훨씬 많다. 이런 말은 그들이 그저 미련했기에, 노력하지 않았기에 가난하게 죽는다고 말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련하지도 않을뿐더러 몸을 갈아가며 노력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죽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많이 봤다. (중략) 가난은 쉽게 죄악시할 대상도, 자랑할 대상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실존적이고 실제적인 비극이다. (223쪽)

성공은 ‘오로지 운‘도 아니고 ‘오로지 노력‘도 아니다. 개화할 정도로 충분히 쌓아 온 노력이 좋은 때를 만나 결실로 구체화하는 게 성공이 아닐까. 그러니 남들이 운이 먼저라고 하든, 노력이 먼저라고 하든, 또 다른 뭔가가 먼저라고 하든 일단은 멈춰서 고민하기보다 뚜벅뚜벅 제 길을 갔으면 좋겠다. (중략) 누가 뭐라건 자기 의지로 걸아야 한다. 외부에서 유발한 동기는 가치도 효용도 없다. 내부에서 유발한 동기만이 나를 투과하지 않고 남는다. (233쪽)

애초에 좋은 위로의 말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의문이다. 격과 식을 갖춘 말이야 있겠지만 온전히 마음을 달래 줄 수 있는 마법 같은 위로의 말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이번에도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고 종일 먹먹하다. (중략) 개인적인 행복과 타인의 불행을 동시에 마주하는 순간에도, 때로는 죄책감으로 때로는 감사함으로 삶을 이어간다. 삶은 이토록 모순적이고 불가해하다. 감히 번역해 낼 수 없을 만큼. (272쪽)

나의 온기를 나누거나 타인의 온기를 인식하는 것은 감각의 영역 같기도 하다. 나의 나의 온기를 나누거나 타인의 온기를 인식하는 것은 감각의 영역 같기도 하다. 나의 온기가 필요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도, 외부의 손길이 계산 없는 온기라는 것을 판단하는 것도 감각이다.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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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작가의 글을 읽고 사진 속의 그를 한참 보았다. 찰스 부코스키다. 

부코스키의 유럽 여행 사진 87장과 에세이, 시가 들어 있는 책, '셰익스피어도 결코 이러지 않았다Shakespeare Never Did This'

진짜 날 것의 글로 가득하다. 자주 자주 보이는 '조또, 써글, 씨펄, 또라이, 떡 치고' 같은 왠지 나오면 안 될 거 같은 단어들이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느끼는 대로 감정에 의해 행동한다고 말한 작가의 에세이와 시는 자기 마음이 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쓴 글이다.

흔히 감정대로 행동한다는 사람들과는 별개로, 작가는 다치고, 고문 당하고, 저주 받고, 길 잃은 사람들에게 마음이 향한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거의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떠돌이 개, 공장 근무자의 생활, 길바닥의 삶, 빈자와 불구자와 미치광이의 방 같은 하찮은 것들에 관심을 둔다. 그런 하찮은 것을 가지고 글을 쓴 부코스키는 미국의 저명한 시인이자 산문 작가였다. 이제야 알았다. 또 마흔아홉 살에 전업 작가가 되었단다. 

부코스키와 린다 리는 서로 대척점에 있지만,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견딜 만하면서도 견딜 수 없는 거리distance가 오히려 그들을 묶어주었고, 사진에서도 그들은 완벽했다.

부코스키의 글은 삶에서 나온 것들, 진짜 삶에서 나온 것들, 지어낸 것들이 아닌 진짜의 글이었다. --- 이들처럼 관계를 유지하고, 그 사람처럼 글을 써야겠지. 그럼 술도 많이 마셔야 할까... 하찮은 것들에게 마음이 자꾸 가려하면... 정작 내 마음은 길 잃은 사람들에게 가긴 할까, 싶다. 


지금 나는 이러한 상태다.

세월은 빨리 간다마는, 겨울로 가는 길목이 제일 싫다. 이 때의 날씨에 가장 민감하다. 재채기가 연신 나오고, 콧물이 흐르고, 손발이 시리다. 이 만큼 나이가 되면 적응도 되었잖아, 그러려니 하면서 살자.

연주회 갔는데, 사회자는 괜한 말(공연과 관련된 말만 하면 된다) 해서 사과하고, 연주자 중 한 명은 본인 파트가 쉴 때 부산하게 움직여 집중을 흩뜨렸다. 그러나 나머지는 너무 좋았잖아, 다른 건 신경 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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