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라는 의미를 다른 시각으로 크게 되새긴다. 그 많은 실패를 아무렇지 않게 만드는 글이다. 오히려 실패는 삶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실패를 이겨내고 견뎌내야만 하는 시각이 아니라 실패를 삶의 구성 요소로 삼을 수 있으며 결핍을 넘어서 새로운 조건의 기반으로 볼 수 있는 자세로 확장시켜준다. 글을 읽으면서 실패한 모습을 되새김하고 후회와 자책으로 돌아가는 무한 반복의 시간이 멈춤 했다.

저자는 프란츠 카프카, 페르난두 페소아, 장 콕토 같은 작가들을 실패의 예로 든다. 우리가 읽고 있는 작품들이 이들의 실패에서 나왔다는 게 놀랄만하지 않는가. 그리고 스스로 실패했다고 여기고, 실패자로 자신을 규정했다는 사실에서 많은 위안을 받았다. 

특히, 번역에 관한 부분과 읽을 줄 안다는 부분을 읽을 때, 실패라는 사실을 의연히 편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모든 책은 번역 불가능하고, 번역가는 덧없는 것을 마주하는 위대한 실패자(54쪽)이기 때문이고, 텍스트를 읽을 때마다 무슨 말인지 몰라 실패를 거듭하지만 의미의 명쾌함이 무에 그리 중요할까, 텍스트는 나에게 말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인 것처럼 보이기(205쪽) 때문에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러고 보니 실패는 존재 이유, 일상적으로 감당해야 할 몫, 삶의 원동력으로 이제는 '더 낫게 실패하기'가 숙제이다.

그리고 저자의 실패 목록(76쪽/103쪽) 중에서 전화 한 통 넣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권 완독하기/ 자기 기만의 강력한 유혹에 저항하기/ 책 귀를 접거나, 맹인을 치거나,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을 사는 지경까지 나를 놓아 버리기/ 후회하기/ 등이 흥미롭다.

덧붙여 나의 실패에 위로가 되어 준 71쪽 글이 있다. '나는 글을 쓰면서 실패하기 때문에. 혹은 글을 쓰면서 실패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삭제하고 다시 쓸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비단 글 쓰는 사람만이 아니라 다시 쓰는 사람recrivain이 되어야 한다.' 

[각별한 실패]를 각별하게 강력하게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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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별한 실패 - 글쓰기의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힘
클라로 지음, 이세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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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llir‘, 이 동사는 뭔가를 행하는 것인 동시에 행하지 않는 것, 실패인 동시에 아무것도 심지 않는 것이다. (11쪽)

베케트의 저 유명한 문장을 어찌 인용하지 않을 수 있으랴.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가. 더 낫게 실패하라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하지만 이 수수께끼 같은 명령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더 낫게 실패하라니? (19쪽)

번역은 실패의 명문 학교다. 프루스트 말마따나 질투가 사랑의 진실인 것처럼, 번역이 문학의 진실일 수도 있다. (33쪽)

카프카의 작품은 미완으로 얼룩지고 결함에 침식당하고 파편적으로 흩어진 채로도 그 필사적이고도 견실한 노래로 감동을 준다. 그 노래는 글쓰기를 불가능한 구원을 연결하는 것만큼 확실하게 실패를 삶과 연결한다. 다른 작가들이 보잘것없는 성공에 만족할 법한 지점에서 카프카는 멋지게 실패해 낸다. (중략) 이 실패는 창조의 조건이다. 카프카는 실패에 저항하여 글을 쓴 게 아니라 실패와 더불어 썼다. (94쪽)

페소아는 습관의 인간이었다. 글쓰기만이 중요하고, 자신이 정해 놓은 작업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무조건 두려워하고 보는 인간, 그렇지만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했다. 모든 것은 변한다. 정부, 도시, 가까운 이들마저도. (140쪽) 물론 이명異名 문제도 페소아가 자아를 고정하고 목소리를 통일할 수 없도록, 나아가 그럴 능력이 없었음을(거부했음을?) 보여준다. 수많은 인물로 이루어진 이 놀라운 파편화는 불안을 자아내는 그의 근본적 공허를 내보인다. 만약 그가 여러 명이라면 한 사람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141쪽)

자기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실패이지만 타자들로서만 존재하는 것도 실패감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페소아는 이 두 가지 실패의 마찰에서 무한히 열려 있는 작품, 끊임없이 폭발하여 재구성되면서도 안정된 작품, 믿을 수 없는 다면체의 광시곡을 창조할 수 있는 거의 초월적 힘을 끌어냈다. ([불안의 책]은 그 뚜렷한 증거다. 페소아는 이 책에 최종적 형태를 부여하지 못했다. 그래서 프랑스어 번역본만 해도 판봉이 네 가지나 된다.) 페소아의 다극성 무기력은 사실 놀라운 폭발력을 지닌 엔진이었다. (151쪽)

콕토는 모든 것에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중략) 실패의 미학이야말로 유일하게 지속 가능한 미학이다. 실패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이미 졌다. (중략) 콕토의 실패는 실패감과 분리되지 않는다. 혹은 콕트의 경우는 실패감이 실패 그 자체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현실적이라고 하겠다. (중략) 그렇다면 이 끝없는 실패감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실패는 어떻게 미학을 정초할 뿐 아니라 콕토처럼 이름난 작가가 가장 잘 간직한 비결이 되었을까? (중략) 영원히 이해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이름깨나 날리는 동료 예술갇르과 어울리면서 더욱 심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콕토는 일종의 삐뚤어진 질투에 시달렸다. 그는 프루스트, 피카소, 주네가 되기를 꿈꾸지 않았다. 차라리 그랬으면 나았을 것이다. (159-161쪽)

그렇지만 사랑받고 싶다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의해 움직이고, 때로는 댄디즘에 매몰되며, 때로는 유행에 호되게 두들겨 맞으며, 세상이 가볍게 여겼던 콕토는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을까? 콕토는 실패의 불안정한 미학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 과격한 경계와 유행의 조롱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진심으로 자기 시대의 천재가 되기를 원했으나, 언론과 동료 예술인들은 그를 재주 좋은 광대, 뛰어난 제작자, 변덕스러운 도깨비 역에 한정시켰다. 20세기의 가장 놀라운 시 중 하나인 [레퀘엠]을 쓴 콕토는 그의 방어적 교만으로 인하여 사교계의 잠자리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의 가장 큰 실패는 이 현실을 무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68쪽)

읽기를 배우는 것과 읽을 줄 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 말하자면 극과 극이다. (중략)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내가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깨닫는다. 나는 나를 만나러 오는 것, 내게 닥치는 것을 여전히 읽을 줄 모른다. 이것이 시의 아주 위협적인 장점 중 하나다. 우리를 다시 한번 텍스트에 부딪히는 어린아이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 (186-187쪽)

실제로 읽는다고는 하지만 읽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중략) 그렇다. 의미는 결코 떡하니 주어지지 않는다. 의미는 때로 거부당하고 때로 부재한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페이지를 마주한다. 우리는 읽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우리는 말이 이해력의 세상을 버리고 떠났는지, 아니면 우리가 말의 마법에 공명하지 못하는 것인지 알고 싶다. 카프카의 말마따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처럼 파고들기에 실패한 것은 페이지와 우리 가운데 어느 쪽인가. (202쪽)

그래서 나는 기꺼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어가면서 실패한다. 완전히 제로도 아니고 제논을 추종하는 거북이처럼 모든 행에서 하나하나 축적해 간다. 그렇지만 텍스트 앞에서 - 행 앞에서, 시구 앞에서, 페이지 앞에서 - 좌초할 때도 텍스트를 읽으면서 읽지 않는 때만큼은, 혹은 그 이상으로 배우는 바가 있다. 텍스트는 펜 가는 대로, 오직 나에게 말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인 것처럼 보인다. (중략) 저항하는 책 안에서 버티는 것도 의미가 단어들의 지평 너머로 저물어 버린 때에 황혼의 횡단을 경험하는 것이다. (205쪽)

꿈꾸던/ 원하던/ 생각했던 책의 실패야말로 그 책이 구현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부딪히게 되는 이 무능 혹은 불가능성이야말로 기회라고 나는 믿는다. (선택은 아니지만!) 책은 혼란스러운 충동들의 소굴에서 태어나 생생한 이미지들을 먹고 자라며, 의도 혹은 상상의 부양을 그럭저럭 받지만 우연성의 불가피한 시간을 마주하는 것은 오롯이 책 자신의 몫이다. (239쪽)

실패하고자 노력하기 (중략) 글을 쓴다는 것은 실은 글 쓰는 방법을 모르면서 인생을 바치는 것. 끊임없이 다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나는 글을 쓴다고 믿으면서 필사했따. 그들을 추종한다고 생각하면서 모방했다. 계속 쓴답시고 방향을 바꾸었다. (중략) 나는 실패의 미묘한 기쁨을 발견했고, 어쩌다 가끔 듣는 찬사에 취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중략) 나는 제법 사랑받았고, 책들은 내게 그늘이 되어 주고 내 곁에서 함께했다. (중략) 나는 말을 하는 대신 글을 쓸 수 있었고, 다르게 실패할 수 있었다. (중략) 그 고장난 욕망으로 내게 유일하게 중요한 한 가지를 해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리라. 책 한 권 쓰기. 책들을, 무한히 써내기. 마지막 책은 언제나 끝에서 두번째 책이라는 마음으로. (242-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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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한 번은 가보고 싶다, 그 길을 걷고 싶다,에서 도저히 못 갈 거 같다. 못 가겠다. 안 가겠다,로 바뀐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저자가 까미노를 걸으면서 수집한 사람들의 말을 글로써 체험한다. 

사람들이 남겨 둔 여러 언어로 된 다양한 말에서 저자가 선택했지만, 그 말에서 내가 또 선택한다.

말, 말, 말이 너무 많다. 넘쳐 나는 세상에 또 끄적거려 보탠다.

누구에게 긍정이든, 부정이든 닿는 말이기를 바란다. 


우리말로 읽을 때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THE'의 의미가 '그'는 맞지만..

WHEN YOU LOSE THE MEANING OF THE WAY, 

REMEMBER WHAT YOUR CAMINO SHOULD BE, 

NOT "THEIR" OR "THE"

길의 의미를 잃었을 때, 

'당신의' 까미노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기억하세요. 

'그들의'나 ''가 아니라(78쪽)


*이 참에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이라도 가볼까,싶다.

*어마 무시하게 비가 온다.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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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의 말 -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수집한 인생의 문장들
홍아미 지음 / 아미가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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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West.
펫숍보이즈의 유명한 노래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의역하면 ‘죽다‘, ‘몰락하다‘라는 뜻이다. 답은 금새 나왔다. 아,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구나. (16쪽)

모두에게는 각자의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컨트롤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96쪽)

이상했다. 까미노를 걸으면 걸을수록 내가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중략) 잠깐 쉴 수 있게 자릴 내어주는 예쁜 벤치까지 세상 모든 존재들이 나를 축복해주는 것 같았다. 때로 그것은 까미노의 말로 현현했다. 다치지 않기를, 무사히 완주하기를, 행운이 함께하기를..... (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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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 모를 기분에, 이빨이 날듯 말듯한 근지러움 같은 그런 애매모호하고 집중해도 풀어내기 힘든 그런 기분, 휩싸여 지냈다. 몇 권의 책은 읽었지만, 굳이 뭘 쓴다고, 아니 끄적이겠다고 하면서, 알라딘 서재를 애써 피해 다녔다. 

그런 차에 읽은 '삶을 견디는 기쁨'이다. 지금 네 모습 그대로 받아 들이고, 힘들면 잠 좀 자고, 음악 듣고, 시를 짓고. 산책하고, 삶에서 고통은 당연지사이고 받아 들일 수 있는 능력은 충분하게 가지고 태어났으니, 그저 받아 들이라고, 결국 누구에게 칭얼대어도 '도착지는 모두가 다 같다. (중략)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가야 한다(81쪽).' 

힘이 되면 받아 들이고 아니면 말고, 견딜 수 있음도 기쁨이 되니, 견뎌 보는 기쁨도 누려보고 싶다. 매번, 언제나 행복할 수는 없는 삶이니, 일어났던 수많은 괴로운 일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즐거웠던 순간들에게 마음을 주고 싶다.

책을 펼치면 명언, 그림, 시들이 가득하여 행복하게 사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행복은 작고 소소한 일상에서 반짝이고 있다. 눈을 돌리고 거둬들이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한 수고 정도는 견뎌낼 만하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C.S. 루이스)는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자신의 조카, 신참 악마 웜우드에게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인간을 유혹하는 방법에 대하여 충고하는 31통의 편지이다. 특히 '사랑하는'으로 시작되는 편지에서 편견은 깨졌고, 환자는 사람을, 원수는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글을 재해석해서 읽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저자가 글 쓰는 데도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감히 들었다.   


:작별곁에서(신경숙)는 읽다 보니, 지난번에 읽은 글이라 덮었다.


:성경 한눈에 보기 구약(전희준)은 구약에 관한 성경 공부를 끝내고, 공부하면서 이해가 잘 안되고,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 읽었다. 개론서로 충분했다.  


:에세이의 준비(강보원)는 글을 좀 잘 써보고자 하는 욕심이 앞서서 집어 들었다. 준비는 형식이다, 글을 쓰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기, 연필 깍기, 책상 정리, 책 읽기까지 내가 글을 쓰기 전에 하는 모든 일들이 준비에 해당한다. 준비라는 말은 많은 위안을 준다. 나도 준비 중이다.  


:추락(J.M. 쿳시)은 번역을 엄청 잘했다. 그냥 빠져든다. 아들이 자꾸 떠올랐다. 각자 잘하자. 자신의 일만 잘해도 된다, 주제와는 좀 먼 듯하지만 암튼, 그랬다. 


:더 나은 실패(김미현)는 조금만 읽어서 아직이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많이 빨리 흘렀다. 2달 간 구약 성경 공부와 2년 가까운 논어 공부를 마쳤다. 도서관 봉사를 하고 있다. 퇴직하면서 한 주에 배우는 하루와 봉사하는 하루를 정했는데, 그런대로 지키고 있긴 하다.

내일은 부모님 보러 간다.  


다음과 같이 살아봐야겠다. 


화요일에 할 일을

목요일로 미루는 일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사람이 나는 불쌍하다.
그는 그렇게 하면 수요일이 몹시 유쾌하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182쪽/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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