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 나온 책과 읽은 책의 표지가 다르기에, 밑줄긋기의 쪽수도 다를 수 있다.) 수박은 한국에서는 과일로 취급하지만, 서양에서는 좀 달랐다. 뭐든 굽고 볶는 서양은 과일도 날로 먹는 법이 적었다. 배나 사과, 복숭아, 파인애플, 바나나도 굽고 삶았다. 물 많은 멜론이나 수박도 여지없었다. 수박을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오일이나 버터 녹인 팬에 구우면 제법 그럴싸한 맛이 난다. 아하, 수박도 채소구나, 그런 미각의 신천지를 열어준다. 겉은 따뜻하고 부드럽게 녹고, 속을 씹으면 아삭하다. 수박을 꼭 익히지 않더라도 후식이 아닌 요리에 쓰는 건 흔한 일이다. 듬성듬성 썰어서 샐러드에 넣는다. 이건 그리스식이 유명하다. (48쪽)
호남의 한식 기행은 수직적인 변화를 가진다. 저 남도의 끝이 더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맛이라면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맛은 유순해지고 슴슴한 재로의 맛을 강조한다. 담양의 밥상에서는 그 온후하고 융숭깊은 자연을 보여준다. 갯것과 들과 산의 물산이 고루 섞인 밥상은 천천히 당싱의 혀를 어루만진다. (102쪽)
한 개의 달걀은 백 몇십 원에 불과하다. 그렇게 값싼 달걀이지만, 무궁무진한 요리법으로 요리사들을 괴롭힌다. 주로 미국이나 영국 요리사에게 해당되지만, 간단한 아침 달걀 요리 하나에서도 A4지 몇 장을 채우고도 남을 요리법이 있다. 우선 프라이를 보자. 뒤집지 않고 한쪽만 익히는 서니 사이드 업, 뒤집지만 살짝 굽는 오버 이지, 완전히 익히는 오버 하드 등으로 나뉜다. 영국이나 미국의 고급 호텔의 아침 식사는 다른 건 몰라도 달걀만큼은 요리사가 직접 불을 때서 즉석에서 요리하는 게 원칙이다. 파랗게 면도를 한, 갓 수습을 땠을 것 같은 어린 요리사가 살가운 표정으로 주문을 받다 만들어주는 달걀 요리는 정말 받아 먹을 만한 가치가 있다. 앞서의 프라이 요리는 물론, 다른 요리도 다 된다. 마구 휘젓는 것 같지만 일정한 농도와 질감을 내야 하는, 그래서 초보 요리사를 골탕먹이는 스크램블드에그도 있고 끓는 물에 예쁘게 익혀내는 수란도 있다. 치즈 등 고명을 얹어 오븐에서 굽는 사이드 에그도 있으며 반숙이나 완숙 달걀은 기본이다. (169쪽)
대구는 대서양에서 잡히지만, 명물인 소금에 절인 대구는 지중해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맛이 든다. 마치, 아무리 좋은 고등어라도 간잽이의 절묘한 소근 재는 기술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듯이, 그 대구 ‘간잽이‘의 손기술은 날래고 아슬아슬하다. 너무 짜게 소금을 매기면 대구의 조직이 쭈그러들고, 심심하면 오래 보관하지 못하고 맛이 제대로 배지 않는 까닭이다. 내장와 머리를 버린 대구를 한 켜로 쌓고 ‘간잽이‘는 질 좋은 천일염을 삽으로 펴서 끼얹는다. 다시 대구가 한 켜, 한 켜 올라가고 그때마다 엄청난 양의 소금이 대구 사이사이로 스며든다. 대구살이 소금을 먹어 수분을 내주면서 조금씩 단단해진다. 인간이 미처 다 알지 못하는 절임의 미학이 이루어지는 기나긴 순간들이다. ‘꾸득꾸득‘하다고 해야 할까. 대구가 적당한 수분을 남기고 절여지면 비로소 바칼라, 그러니까 포르투갈 사람들이 바칼라우라고 부르는 이 천상의 해물이 완성된다. (224쪽)
내가 간혹 들르는 서울의 문어 파는 술집들은 하나같이 이미 삶은 문어를 강원도든 경상도든 산지로부터 받아 썼다. 직접 요리하지 않고, 이미 삶아진 것을 받는다고 자랑하는 희한한 식당도 다 있구나, 생각했는데 이유가 있었던 거다. "간고들어는 간잽이가 젤로 중요하고, 문어는 삶은 사람이 젤이다." 어머니와 꽤 찬한 그 문어 가게 주인에게 물어봐야 이것도 ‘며느리도 안 가르쳐주는‘ 비법이라고 할까. 문어마다 다리 굵기가 다 다른데도 어떤 문어든 씹으면 살살 녹았다. 나는 문어를 씹으면서 그 비법을 음미했다. 다리 안쪽의 신경섬유질을 둘러싼 부분을 살짝 덜 삶아서 쫀득하게 씹히고, 그 주변의 살은 어느 정도 푹 익힌 것처럼 이빨 사이로 쑥쑥 씹혔다. (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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