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과거의 구석 아무데서나 찾아온다. 머릿속에 그런 자잘한 기억들이 지워지지 않고 박혀 있다는 것이 재미있어서 비스듬히 누워 웃었다. (17쪽)
‘나‘가 이곳에 없을 때 ‘이곳‘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 ‘나‘가 이곳에 있으니 다른 곳에 ‘나‘가 자리를 비운 것이다. (72쪽)
바다는 겨울을 보내고 봄의 파랑으로 또 스산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 사라지고 다른 형상의 그림자들이 찾아오고 지나가면서 교차하느라 시장이며 길이며 물이며, 세상 곳곳이 두런거리며 분주하다. 검푸른 바다 속에서 쇠미역이 너울거리고 이미 진부령, 새령에선 개머루 줄기빛이 다르다. 마풍이 나뭇가지를 붙잡고 놀자고 자꾸 보채는 이른 봄철이 화살처럼 달려간다. (79쪽)
치어들이 모두 바다로 들어간 뒤, 온 세상은 조용하다 못해 평화롭다. 봄빛은 그 평화를 아는 사람의 마음을 텅 비게 하고 슬프게 한다. 모든 것이 떠나갈 때는 기다리는 것이 없고 남은 자만이 서 있다. 진아도 같이 그 길을 떠나고 싶을 뿐이다. 연어의 치어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3월의 양양과 속초 바다의 바람을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97-98쪽)
쿠릴 열도는 수많은 섬으로 이어져 있는, 징검다리와 같은 경계로서 수심이 낮다. 말하자면 연어들은 이 수심이 낮은 쿠릴 열도를 징검다리 삼아 북양으로 건너간다. 이곳은 플랑크톤이 풍부한 해류들이 만나 천천히 맴도는 거대한 바다다. 식이회유하고 산란회유하는 연어들이 휴식할 수 있는 먹이가 풍부한 곳이기 때문에 이곳을 경유하지 않는 연어는 없다. (143쪽)
그러나 분명한 일은 아시아계 연어들은 연해주, 캄차카, 아무르 강, 북해도, 오호츠크 해 등의 극동 일대를 회유하면서 해류와 수괴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해류의 방항과 유속에 따라 그리고 계절에 따라 먹이를 찾아서 그들은 이동해간다. 그 신비한 회유의 길은 인류가 탄생하여 이동하기 훨씬 이전부터 있어왔다. 알류산, 캘리포니아, 알래스카, 쿠릴 해류가 이 지구상에 형성되면서부터 그들은 그 길을 오고갔다. (153쪽)
그들이 돌아가는 곳이 바로 그들이 태어난 곳이다. 배링해에서 아무렇게나 떠돌고 있는 것 같아도 그들을 끝까지 추적해보면 그들은 어느 한 하천이나 강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그들이 태어난 고향이다. (214-215쪽)
거대한 해양, 끝없이 연안으로 이어져 있는 대륙붕이 있고 수많은 해안과 포구들이 있지만, 그 모슨 유혹을 뿌리치고 마침내 어떻게 컬럼비아 강 연어는 컬럼비아 강으로 돌아가고 남대천 연어는 남대천으로 돌아오는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20쪽)
나는 노인의 검버섯이 아름다운 뺨을 바라보며 정신이 번쩍 드는 연어들이 지나가는 하천 물속에 슬쩍 손을 넣어 그들을 만지고 싶었다. 연어의 검은 등을 어루만져주고 싶었다. 3년간 달려갔다가 달려오는 그들을 위하여, 훌쩍 몸이 큰 그들을 기쁘게 맞이하고 싶었다. (286-287쪽)
아름답다. 연어의 귀도가. 그들의 먼 물길이, 저 작은, 흐르고 파도치는 자궁 같은 동해로 나오고 있는 가을의 오십천과 왕피천과 남대천, 저 북쪽의 모든 하천들이, 그리고 고요한 시간이. 찬란한 해일의 아침이. 어수선한 소음의 물속에서 쏜살같이 민물 속으로 몸을 던지는 훤칠한 암수의 연어들이. 그리고 어둠이. 그리고 사람들의 시간이 없는 절대고요의 시간 속에서 아침저녁이 반복되는 것이. 그 시간에 가닿고 싶은 까닭은 그곳에 인간들의 덧있음과 초월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91쪽)
연어에게게는 한 가지 불가해한 일이 있다. 연어는 모천에 돌아오면 그때부터 어떠한 생명도 일체 건드리지 않는다. 즉 연어는 살생하지 않는다.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하천으로 돌아도면서부터 그들은 일체의 먹이를 입에 대지 않는다. 오직 물만을 삼켜서 아가미 쪽으로 내보낸다. 암수가 똑같이 굶는다. 마치 먹는 일을 잊어버린 것처럼. 연어의 영물다운 면모는 바로 이 점이다. (337쪽)
얼마 전까지만 해도 먼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격식 있는 생사법이 있어서 그들은 연어다운 일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산행의 장례가 사라진 것처럼 연어들도 인공으로 수정되고 몸은 피로 처분될 뿐이다. (40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