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할 당시 푸줏간 주인, 빵집 주인, 양조장 주인이 일하러 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부인, 어머니, 혹은 누이들이 하루 종일 아이들을 돌보고,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빨래하고, 눈물을 훔치고, 이웃과 실랑이를 해야 했다. 어떤 식으로 시장을 바라봐도 그것은 또 하나의 경제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경제 말이다. (31쪽)
그러나 남성과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차이 난다는 점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는가 하는 것이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임신과 출산을 한다는 것일 뿐이다. 여성이 집에 머무르면서 아이가 대학에 갈 때까지 돌봐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의 육체에 여성 호르몬이 더 많이 분비된다는 것의 의미는 말 그대로 육체에 여성 호르몬이 더 많이 분비된다는 것이다. 수학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만이 쾌감만을 느끼기 위해 존재하는 신체 부위를 가졌다는 것의 의미는 여성만이 쾌감만을 느끼기 위해 존재하는 신체 부위를 가졌다는 것일 뿐이다. 이사회의 임원으로 일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61쪽)
돈을 나눠 가질 때, 5세 어린이들은 돈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에는 전혀 관심 없고 가능한 한 많이 가지고 싶어 했다. 가질 수 있는 액수가 적은 경우에도 아예 못 받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일단 쥐고 봤다. 경제적 인간처럼 말이다. 그러나 세계경제를 운영하는 것은 5세 아이들이 아니다. 아니면 실은 5세 아이들인가? (149쪽)
신자유주의자들은 정치를 없애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들은 ‘정치가 시장을 섬기기‘를 바란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경제를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경쟁과 합리적 행동을 장려해 경제를 이끌고 지지하고 보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신자유주의 경제학 이론은 정치가 경제에 손을 못 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정치가 손을 바쁘게 놀리도록 하는 상태를 기초로 만들어졌다. (214쪽)
경제학자들은 낭만적 관계를 두 명의 독립적인 개인 사이의 합리적 계산으로 묘사한다. 그들은 낭만적인 관계에서 실제로 의미가 있는 것은 모두 제외해 버린다.(...)느낌이나 감정은 사람의 일부가 아니다. 경제적 인간의 세상에서 느낌이란 분류하고, 정리하고, 쌓고, 구분하는 것이다. (250-251쪽)
무엇이 의존이고 누가 누구에게 기생해서 사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항상 정치적인 문제였다. 애덤 스미스가 어머니를 필요로 하는가, 어머니가 애덤 스미스를 필요로 하는가?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의존한 채 살아가고, 따라서 사회는 생산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우리 자신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항상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이야기할 매체가 필요하다. 현재의 경제학에 인류의 현실적인 경험을 위한 자리는 없다. 주류 경제학 이론은 허구의 인물, 여성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하는 인물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보통 사람들은 경제학자들이 당연히 인류가 직면한 바로 이 굉장히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데 골몰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심지어 남성마저도 가지고 있지 안은 그 남성적 특성에 대한 가정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세상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281-282쪽)
여성들이 돌보는 일을 책임지는 것은 자유 선택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고, 본인의 자유 의지로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는 아무 말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를 적용한다. 북유럽 복지 국가들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제 체제는 여성들이 아주 낮은 비용으로 특정 임무를 수행해 내는 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292-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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