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만난 다른 세상에서 나는 행복했다. 배낭을 메고 길 위에서 있는 한 온전히 나 자신으로 남을 수 있었다. 아무런 가면도 쓰지 않은 얼굴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오직 내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날들이었다. 내가 웃으면 온 세상이 나를 위해 웃어주었다. 가끔씩 외롭기도 했지만 외로움은 내가 지닌 자산이었다. 외로움은 여행을 계속하고, 글을 쓰고, 타인에게 가닿을 수 있게 하는 근원이었다. (36쪽)
성큼성큼 다가와 열렬히 달아오른 마음을 드러내고, 상대가 그 뜨거움에 데일까 두려워 머뭇거리다가 조금씩 따뜻해질 무렵이면 이미 식어버린 심장을 내려놓고 돌아서는 사람들이 있다. 찰나의 뜨거움보다는 오래도록 식지 않는 따뜻함에 위로받고 싶은 이에게 독이 되는 사랑을 하는 사람들. 그 심장의 온도차는 사람의 시차를 만들어내고 끝내 이별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112쪽)
심장에서 뇌까지의 거리가 멀어 고혈압을 달고 산다는 기린은 다리를 천천히 벌려가며 물을 마실 때 가장 치명적으로 위험에 노출된다고 했다. 뒷다리는 포식자의 목뼈를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만 긴 몸은 기린의 약점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기린은 늘 단독자였다. 무리를 지어 세력을 만들지 않았고, 기껏해야 두세 마리가 함께 다닐 정도로 기린은 강인해 보였다. (162쪽)
사랑이 끝난 후 많이도 늙어버린 것 같고, 세상의 이치를 다 알아버린 것 같은 그런 시간을 우리도 건너오지 않았던가. 한 마음이 누군가의 마음을 빠져나와 다른 마음에게도 가는 일은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이라 그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토록 가벼운 마음에 의지해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은 상처를 자처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206쪽)
‘사람의 마음은 깊고 또 이상할 만큼 얕다. 사람은 그 얕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출렁이는 얕은 마음. 책 한 권으로 설레어 잠 못 이루고 괜히 막 마음이 충만해지는 밤이다.‘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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