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물건을 사서 얻을 수 잇는 즐거움이 아니라 뭔가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입니다. 즉, 구매가 아니라 경험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28쪽)
우리 사회에는 자기 스스로 느끼기보다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내 감정은 감추고 다중의 의견을 살펴야 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겠죠.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느끼는가. 뭘,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것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가? (35쪽)
서재는 오래된 목소리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영혼에 접속하는, 일상에서는 쉽게 만나기 힘든 타자를 대면하는 공간입니다. 사실 우리가 낯선 것을 가장 안전하게 만나는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에요. (80쪽)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이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는 이들. 기술의 발전이 모든 문제의 해답은 아니라고 믿는 이들. 현대화된 이사 서비스는 과연 집에 대한 인간의 오랜 신화적 두려움도 없앨 수 있을까요? 벼락이라는 자연 현상은 피뢰침의 발명으로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제가 묻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 오직 문학만이 답변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저의 관심사입니다. (126-127쪽)
독자는 문학작풍이라는 이 기묘한 상품을 사서 그것과 고유한 관계를 형성합니다. 여기에 작가의 자리는 없습니다. 반면 작가 역시 자신의 작품과 나름의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작가 역시 자아를 해체하면서 작품을 완성해나가게 되는데, 이 과정에 독자라는 추상적 존재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작가-작품-독자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작품......작품-독자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169쪽)
소설을 쓴다는 것은 가장 적극적인 방식의 ‘듣기‘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써나가는 동안 작가 자신이 해체됩니다. 해체되지 않고 새로운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가장 낯선 곳에서 작가는 일을 시작합니다.......어쨌든 작가는 매번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규칙으로 새로운 인물들을 겪어야 합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작가의 말 따위는 듣지 않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그들은 마치 들리지 않는다는 듯 딴전을 피워댑니다. 마침내 작가는 깨닫게 됩니다.....따라서 ‘듣기‘는 윤리이기 이전에 작가가 직면한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신념, 지식, 습관, 정치적 성향, 취향)을 서서히 해체하면서 엄청난 노동을 투입하여 한 세계를 만들어가는데, 지나고 보면 그것이 결국 ‘받아적기‘ 혹은 ‘듣기‘였음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173-174쪽)
한국소설의 세계화와 관련해서도 ‘한국소설은 뛰어난데 번역 때문에 알려지지 않는다‘고 주장하시는 분이 많은데, 물론 뛰어난 소설들이 있겠지만 ‘잘 썼다, 잘 번역했다‘고 해서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는 소설은 여러 문화으 혼종을 통해 빚어진 변종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돌연변이의 산물이기 때문에 미리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고, 기획하여 생산하는 것도 어려울 겁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게 만약 실현된다면, 그 주인공은 아마도 한국의 정서를 잘 살린 문학이 아니라 이상한 것, 어지럽게 뒤섞인 것, 도저히 우리가 한국문학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정말로 한류를 지속시키기를 원한다면 더 열심히 하는 것보다 더 이상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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