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정리하자면, 국가는 대자본의 현실을 돕는 안전망이자 심지어 여리꾼 노릇을 하고, 종교는 자본의 성취와 번영에 대해 뒷북을 치며 축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국가와 자본과 더불어 삼위일체를 이루는데, ‘하나의 체계(세계)는 신화라는 지평의 테두리를 통해 완결된다‘(니체)는 격언 속의 ‘신화‘를 종교(개신교)에 대입시켜보면, 주중의 근실한 노도오가 욕망 그리고 주말의 충량한 믿음과 나눔을 통해 마침내 자본제적 삶의 형식을 완결시키는 종교의 역할을 보다 큰 그림 속에서 요량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A의 신앙적 독실은 대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일까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19쪽)
종교와 몸의 자리가 얼핏 대극적이긴 하지만, 실은 그 상극의 외피가 거대한 원환을 이루면서 내밀한 상생을 이루어간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56쪽)
타인들과의 관계, 특히 한나 이렌트가 ‘정치적 사랑(philia politike)‘-‘세계‘의 공간 사이에 설정한 거리로부터 누군가를 존겨앟는 것-이라고 부른 신뢰와 우정의 관계를 얻지 못한 인격적 카리스마는 종종 나르시시즘에 되먹힌 채 우스꽝스러운 꼴을 연출한다. (83쪽)
‘많이 벌어 많이 내겠다‘는 변명이 얹혀 있는 자리가 실은 얼마나 썩고 곪은 코드들로 얽혀 있는지, ‘자본제적 풍요의 신학‘이란 완벽한 물신학일 뿐이며, 다수의 기독교인이 내세우는 소망이란 게 자본을 향한 호객을 멈추지 않는 여리꾼들의 가면-다만 자신의 몸에 몹시 가까운 탓에 마침내 제 몸이 되어버려서, 자신의 가면을 가리킬 수 없는 가면-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형식의 ‘계급‘ 혹은 신분에 관한 얘기다. (93쪽)
예수를 만난 게 위험한 ‘사건(evenement)이 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양식의 실천 속에서 그 사건과의 검질긴 접속을 ‘좁은 문 속의 희망‘으로 구체화하려는 이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107-108쪽)
지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오직 ‘사람살이‘인데, 거기에는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풍수를 비롯하여 지역의 민속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더러 과감하게 지원하는 이유도 ‘지금-이곳의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려는 그의 일관된 ‘세속적‘ 관심-이것은 가히 사이드(E. Said)를 따라 ‘세속적 관심‘이라고 할 만하다-때문이다. (130쪽)
나는 종교의 완성-종교는 결국 믿는 자의 일생에 근거한 한시성과 실존성에 제한적으로 유효하므로 ‘완성‘이라는 말 그자체가 어패가 있긴 하지만-이 어떤 정서와 분위기에 젖어 있는 생활양식, 그리고 그 생활양식에 의해 검질기게 몸을 끄-을-고 다가서려는 어떤 희망에 의해서만 가능해지리라고 전망한다. 그리고 정서와 분위기, 생활양식과 희망은 이미(역설적이게도) 종교의 것을 넘어간다. 종교는 스스로 빈 것으로 남아, 늘 종교가 아닌 것을 도우는 데 그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종교가 생활을 규제해왔던 현실을 뒤집어, 어떤 현실과 어떤 희망이 종교를 완성시키는 식으로-그러니까 종교가 생활을 도와, 바로 그 생활이 다시 종교를 완성시키는 방식으로-재배치되어야 한다. (132-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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