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이란 결혼한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단절이 아니요. 정상적인 단계 중 하나(마치 신혼여행이 그 단계 중 하나이듯)이다. 우리는 그 단계까지 결혼생활을 충실하게 잘 살아내었으면 하고 바란다." (13-14쪽)
슬픔이 마치 두려움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무섭지는 않으나, 그 감정은 무서울 때와 흡사하다. 똑같이 속이 울렁거리고 안절부절못하며 입이 벌어진다. 나는 연신 침을 삼킨다. 어떤 때는 은근히 취하거나 뇌진탕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상과 나 사이에는 뭔가 보이지 않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다른 사람이 뭐라 말하든 받아들이기 힘들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게다. 만사가 너무 재미없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이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집이 텅 빌 때가 무섭다. 사람들이 있어 주되 저희들끼리만 이야기하고 나는 가만 내버려 두면 좋겠다. (19쪽)
또한 슬픔이 게으른 것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 일상이 기계적으로 굴러가는 직장에서의 일을 제외하면 나는 최소한의 애쓰는 일도 하기 싫다. 글쓰기는 고사하고 편지 한 장 읽는 것조차 버겁다. 수염 깎는 일조차 하기 싫다. 내 뺨이 텁수룩하건 매끈하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불행한 인간은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릴 일이 있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 자신으로부터 끄집어 낼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심신이 피료한 사람이 추운 날 담요 한 장 더 얻자고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는 일어나 이불을 찾아다니느니 차라리 떨며 누워 있는 쪽을 택할 것이다. 외로운 사람이 지저분한 사람으로, 마침내는 더럽고 역겨운 인간으로 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21-22쪽)
만약 하나님이 사랑의 대용품이었다면 우리는 그분에 대한 모든 흥미를 잃어버렸어야 옳다. 바라던 것을 가졌는데 뭐하러 대용품 따위에 신경을 쓰겠는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둘 다 서로 상대방 이외에도 다른 무언가를 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 다른 어떤 것, 다른 종류의 욕구 말이다. 연인이 서로를 소유하게 된다고 해서 책도 읽고 싶지 않고, 먹고 싶지도 않고, 숨쉬고 싶지도 않더란 말이야? (24쪽)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아주 다양하게, 수많은 각도로, 여러 가지 빛 아래에서, 여러 가지 모습(깨는 모습, 잠든 모습, 웃는 모습, 우는 모습, 먹는 모습, 말하는 모습, 생각하는 모습)으로 보아 왔기 때문에, 그 모든 인상들이 우리 기억으로 떼지어 몰려와 결국엔 그저 흐릿함으로 퇴색해 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생생하다. 그 목소리를 생각하면 나는 또다시 훌쩍이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다. (33쪽)
결혼이 내게 주었던 가장 소중한 선물은, 바로 이처럼 아주 가깝고 친밀하면서도 언제나 확실하게 `내가 아닌 남`이며 순종적이지 않은, 한마디로 `살아 있는` 어떤 것의 영향력을 계속 느끼게 해 주었다는 점이다. 한데 그 모든 작용이 이제 무위로 돌아가는 것인가? (39쪽)
그리고 슬픔은 여전히 두려움처럼 느껴진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중간한 미결 상태 같기도 하다. 혹은 기다림 같기도 하여 무슨 일인가 일어나기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슬픔은 삶이 영원히 임시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무언가 시작한다는 것을 가치 없어 보이게 한다. (55쪽)
왜 슬픔이 마치 어중간한 미결 상테처럼 느껴지는지 알 것 같다. 그것은 습관처럼 굳어진 수많은 충동이 좌절되기 때문이다. 나의 수많은 생각과 느낌, 수많은 행동들은 H를 향한 것이었다. 이제 그 목표물이 사라졌다. 나는 습관적으로 활에다 화살을 메기지만, 다음 순간 목표물이 사라졌음을 깨닫고 활을 내려놓아야 한다. 너무나 많은 길들이 H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어 나는 그 중 하나를 택했다. 그러나 이제는 건널 수 없는 경계 표시판이 길을 가로막고 버티고 있다. 한때는 그렇게 많은 길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만큼 많은 막다른 길로 변해 버렸다. 좋은 아내는 한꺼번에 여러 사람 역할을 한다. (72-73쪽)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연애 다음에 결혼이 오듯이, 결혼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죽음이 온다. 그것은 과저으이 단절이 아니라 그 여러 단계들 중의 하나이다. 춤이 중단된 게 아니라, 그 다음 표현 양식으로 옮겨 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연인 덕분에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난다.` 그 다음에는 춤의 비극적인 양식에 따라 우리는 여전히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비록 그 육신의 존재는 사라지고 없어도 연인 그 자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우리의 과거와 추억, 슬픔 혹은 슬픔으로부터의 위안, 자신의 사랑 따위를 사랑하느나 안주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76쪽)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떠나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함께 가져가 버렸는지 알기나 하오? 당신은 내게서 나의 과저조차 앗아가 버렸소. 우리가 함께하지 않았던 과거마저도. 잘려진 부분이 과거와 단절된 고통으로부터 회복되고 있다고 말하다니 틀린 소리였다. 그 고통은 너무나 여러 방면으로 나를 괴롭히면서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드러나는 탓에 내가 속은 것이었다. (89쪽)
하나님에 대한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 자체를, H에 대한 내 생각이 아닌 H 자체를, 그렇다. 우리 이웃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우리 아웃 자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같은 방에 있는 산 자들을 향해 종종 이러한 실수를 저지르곤 하지 않는가? 그 사람 자체에게 말 걸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속에 만든 대략의 그림에다 대고 하는 것이 아닌가?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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