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혼이란 건 가까이 있는 혼들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하면서. 누군가가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만은 혼 힘으로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거였어. 이 낯선 덤불숲 아래에서, 썩어가는 수많은 몸들 사이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자 나는 무서워졌어. (50쪽)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 (77쪽)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지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85쪽)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96쪽)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114쪽)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134쪽)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당신은 자신에게 물은 적 있다. 모든 게 지나갔지 않은가. 당신에게 고통을 줄 가능성이 백분의 일, 천분의 일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당신 스스로 깨끗이 밀어냈지 않나.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니,라고 묻던 성희 언니의 침착한 목소리를 당신은 기억한다. 무슨 권리로 내 이야길 사람들에게 하는 거야,라고 당신이 이를 악물며 물었을 때였다. 이어 대답하던 성희 언니의 차분한 얼굴을 당신은 지난 십년 동안 용서하지 않았다. (161-162쪽)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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