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카페에서 시 읽기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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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또는 시가 우리의 현실 세계를 바꿔놓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우리의 이해와 해석에 의해 구성된 의미의 집합체, 곧 `다시 만들어진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은유 또는 시에 의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해석이 바뀌면 우리의 현실 세계도 바뀔 수밖에 없는 거지요. (42-43쪽)

프롬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사랑을 `능력`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대상`의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파니가 그렇듯이,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인데 다만 사랑하거나 사랑받을 `대상을 만나는 것`이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거지요. 바로 이 그릇된 생각 때문에 사라으이 기술, 곧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기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림을 그릴 줄 모르면서도 좋은 대상만 찾아내면 좋은 그림을 그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다는 거지요. (93쪽)

인간이 실존론적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일찍부터 개발해온 삶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과 휩쓸려 그들이 사는 대로 따라 살면서 그들과의 일체감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체감을 통해 모태로부터의 분리감, 파스칼이 느낀 공포, 하이데거가 말하는 불안, 사르트르가 묘사한 현기즈오가 구토를 잊는 거지요.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는 평균적 일상성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편안한 자신감과 자명한 느긋함"을 제곧하기 때문입니다. (167쪽)

인간은 일상이라는 퇴락한 삶이 제공하는 친숙하고도 편안한 생활에 젖어 있다가 `자신이 퇴락한 삶을 살고 있다`는 `양심의 부름(ruf des Gewissens)`을 듣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탓(Schuld)`이 있다는 죄의식 속에서 스스로 뉘우치고 `양심을 -가지려고-원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의 `본래적 삶`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171쪽)

인간의 `자기`란 `직접성의 인간`이나 `세인`에 대한 강력한 거부감을 통해 비로소 싹트고, 융이 말하는 `자기원형`을 인내와 정성으로 가꾸어야 마침내 피어나는 꽃이며 맺히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218쪽)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우리가 타는 승용차 기름이 서울의 대기 상태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사람들이 흘리는 피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대중교통을 더 자주 이용할 것입니다. 우리가 즐기는 육식이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저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홍수를 유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채식을 더 자주 하게 되겠지요. 이런 일들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사소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하나같이 가치 있는 일들이고, 당신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251쪽)

문제는 끊임없이 당신을 상품화하고 당신을 당신이 소비하도록 몰고 가는 욕망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가 자체 생존 전략으로 조작한 허위의식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277쪽)

이러한 사실은 이제 행복을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요소가 작용하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요소들이 주가되는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283쪽)

이제 우리는 물질적 풍요와 그것이 주는 쾌락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과 그것에 기초한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합니다. 나아가 행복을 위한 개인의 의식 전환과 사회적 환경 개선을 함께 추구하는 새로운 행복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합니다. (287-288쪽)

싱어가 말하는 행복한 삶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할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진정한 자기 이익이라는 점에서 생각해 볼 때" 쾌락적으로 사는 것보다는 윤리적으로 사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295쪽)

즉, 다른 사람들과 동물, 자연에 이익이 되는 나의 행위가 다시 나와 사회에도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거지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개인적 행복과 사회적 행복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그것들은 상호주관적 매듭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바지하지요. (296쪽)

하이데거에 의하면 몰아세움과 닦달이라는 도발적 요청이 성한 곳에서는 식물이든, 가축이든, 심지어는 사람까지도 더 이상 고유한 `자립적 본질`, `갖춘 본질`, `신에 의해 창조된 본질`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근대 이후 인간은 어느 곳에서든 더 이상 사물들의 본질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질마저도 대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지요. 마주하는 모든 것을 하나의 기능화된 부품으로 파악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자신이 파악한 부품들 안에 적응시키기 위해 기능화하고 부품화하기 때문입니다. (333-334쪽)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까요? 이 글은 한마디로 시인이 시의 종복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의 머리(이성)로도 아니고, 가슴(감성)으로도 아니고, 온몸으로, 즉 머리와 가슴을 다 합한 온몸을 다하여 주인인 시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온몸으로 따르는 것이 주인인 시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에, 시인은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가지도 `자발적.선행적으로`다가오는 시를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존재의 언어인 시가 말하고 시인은 내용이든 형식이든 오직 그것을 따라 말해야 한다는 거지요. (3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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