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과 사람 사이 - 건축가 이일훈, 카메라로 세상을 읽다
이일훈 글.사진 / 서해문집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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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마다 벚꽃축제가 벌어지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건만 꽃놀이 광경은 어디서나 소란과 소음의 마당이다. 왜 그럴까. 주최하는 이들이 벚꽃을 즐기는 방법 대신 사람 모으는 방법만 찾기 때문이다. 구경꾼들은 서로 떼밀릴 뿐이니 꽃이고 사람이고 정신없긴 마찬가지다. 모든 축제를 동과 양의 축제로 몰고 갈 필요가 있을까. 꽃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정과 질의 놀이가 아니던가. (31쪽)

30~40년 전에는 무슨 신기술이라도 되는 양 도시의 물길을 콘크리트로 다 덮더니 요즘은 생태, 친환경을 앞세우며 다시 뜯어내느라고 난리다. 공사할 때 돈 들이고 뜯느라고 더 큰 돈 들인다. 거리의 나무도 심었다 뽑았다, 보도블록도 깔았다 걷었다......, 무엇 하나 깊은 생각이 없다. 삶터에 고일 시간이 없으니 환경은 늘 어수선하다. 역사 깃든 피마길은 버리고, 광장도 공원도 아닌 이상한 그림 같은 유원지, 광화문에 새로 만드니 그 역시 어설프다. (87쪽)

구멍가게 간판부터 정치까지 광고 행위의 본질은 꼬드김이다. 꼬드긴다라는 말은 연날리기에서 쓰는 말로, 연이 높이 올라가도록 연줄을 잡아 젖히는 것을 말한다. 연줄을 무조건 당기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흐름과 세기를 잘 살펴 젖히는 요령이 필요하다. 꼬드김만 계속 한다고 연이 잘 날지는 않는다. 머릿살과 허릿살의 균형이 맞게 마름질 잘된 연을 꼬드기면 높이 날지만 성글게 만든 연은 꼬드길수록 허공에서 찢어지고 곤두박질치기 일쑤다. 꼬드김은 사탕발림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꼬드기지 못하는 광고는 죽은 광고다. 광고 전문가들은 사탕발림의 흑심을 점잖게 광고의 호소력이라고 말한다. (149쪽)

집을 짓는 일이란 작은 사회를 경영하는 일이다. 수많은 공사가 연결되니 그에 따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복잡하다. 얽히고설킨 일의 과저오가 세사오가 만나는 방식이 까다롭다. 집 짓는 일은 개인적 문제를 넘어 사람이 땅(자연)을 만지는 일이며, 동네(사회)를 이루는 일이다. 주변 상황을 존중하고 환경을 살리면 자연에 대한 겸양이지만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재양과 폐해가 된다. 뭐든 지으면서 생각하지 말고 짓기 전에 생각하자. 짓다 만 집에서도 배울 게 있다. 급하는 하는 삽질과 망치질, 잘못하면 대대로 이 땅에 죄 짓는 일이다. (157쪽)

횡은 가로지른다는 뜻, 달리는 자동차가 주인이고 건너는 사람은 종이다. 횡은 위태로운 글자다. 비명횡사의 바로 그 횡이다. 계단으로 이루어진 육교나 지하도는 노약자 입장에선 또 다른 장애물이다. 보행자 중심으로 개념을 바꿔야 구조가 바뀐다. 횡단보도 아닌 다른 말은 없을까. 왜 자동차가 항상 우선인가, 다른 장치가 없을까. 더 효과적인 도로 설계와 디자인은 무엇일까...... 등등의 탐색이 계속 되어야 한다. (173쪽)

어떤 상황에 대한 관심과 무관심의 차이는 결국 자신과 연결되는 관계의 거리다. 하지만 관계있음과 없음은 물질의 존재 여부처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모든 관계란 있는 듯 없는 듯, 먼 듯 가까운 듯, 직접적인 듯 간접적인 듯, 오래된 듯 새로운 듯, 큰 듯 작은 듯 연결되어 있다. 세상 만물과 갖은 현상들은 한 줄로 엮인 망태다. 관계의 그물 속에 영향받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보이지 않는 관계를 놓치지 않는 것이 공동성의 지혜다. 인위적 지형에 새겨진 표시는 시간과 함께 사라지지만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된다. 그 누구는 혹시 당신과 나의 친근한 벗일지도 모른다. (183쪽)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는 말은 공간적으로는 시선의 사각지대와 착시를 말하지만, 시간적으로는 달려 나가는 앞길 지나면 그 길이 곧 뒤가 됨을 이르는 것이리라. 뒤를 보는 거울에 새겨진 말, 다가올 앞을 가리킨다. (219쪽)

`오신`날은 일 년에 단 하루다. `오신` 뜻대로 하자면 일 년 내내 365일을 님들이 `오시는` 날로 여겨야 마땅하리라. 성탄을 빛내려면 일 년을 예수처럼 사록, 부처림 `오신` 의미를 살리려면 평생을 부처님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 `오신` 뜻대로 마음 아픈 이와 서러운 이들을 위로하려면 `오신` 날 하루가 아니라 일 년을 하루같이 `오시는` 날로 여길 일이다. 오시는 날이 바로 모시는 날이고 사람 바로 사는 날이다. 언제 어디서나 마땅한 일이 가장 어렵다. (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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