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애써서 하는 일들에 결국은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떠오르는 말이 있다. `우리는 그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한다`는 말. 아이오와에서 만난 아르헨티나의 시인 파비앙이 한 말이다. (17쪽)
"중세시대의 성당을 알아?" "성당?" "하나의 성당이 완성되려면 삼사백 년씩 걸렸던 성당들 말이야. 거기 하나하나 벽돌을 놓던 인부들...... 그들은 결코 그들의 생애에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했지." 그는 편지봉투에 성다오가 인부를 끄적여 그리면서 말했다. "결국 우리가 그 사람들과 같이 않을까. 우리가 평생에 걸쳐서 시를 쓰고 소설을 쓴다고 해도, 결코 그 성당의 완성을 볼 수 없어." 그때 문득, 글쓰기뿐 아니라 모든 삶의 모습이 그와 같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했다.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전체적인 성당의 모습이 어떤 것이 될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한장 한장 벽돌을 구워 쌓아가는 과정. 우리들의 존재는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하나의 먼지 같은 것이지만, 그 먼지 하나하나가 최선의 선의를 품고 존재하는 데에 그 미세한 에너지들의 힘이 있는 것 아닐까. 그렇게 해서, 그 보이지도 않을 만큼 조그만 개개의 존재들 속에 고요히 우주가 깃드는 것 아닐까. (22쪽)
"어땠나요, 이혼한 뒤의 삶이 이혼하기 전보다 나았나요" 하고 내가 묻자 그녀는 "물론"이라고 말했다. "나는 내 삶이 세월과 함께 단계적으로 나아져왔다고 생각해.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것이 그전보다 나았고, 이혼한 것이 결혼생활보다 나았고, 그 뒤로 그 시인과의 관계, 그 관계의 청산까지, 나는 조금씩 더 강해져왔어. 비록 나는 지금 이렇게 늙어가고 있지만, 이제는 내가 매우 강하다고 느껴." 에란디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왜냐면, 거짓말은 사람을 약하게 하니까. 마치 충치처럼 조금씩 조금씩 썩어가게 하니까. 세월이 흘러도 사람이 강해지지 않는다면 바로 그런 경우겠지. 하지만 난 진실을 택했어." (40-41쪽)
벤치에 앉아 나목들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어떤 시간은 빨리 흘러가버리고 어떤 시간은 견뎌야 한다. 한 시간에도 몇 번씩 변기를 붙들고 구토하는 하룻밤은 영원과 같다. 아무도 그 견딤을 돕거나 대신해줄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따금씩 확인하며 우리는 살아간다. 견디는 힘이란 따로 어디에서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쩔 수 없이, 몸의 일부로 만들어져가는 것이다. (101쪽)
누구에게나, 실현 가능하지는 않으나 생각하는 것만으로 즐겁기 때문에 꿈꿔보든 일들이 한두 가지쯤은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서점을 하나 여는 것이다. 생각해둔 장소는 인사동, 경인미술관 골목이다. 골목이 깊이 들어가도 상관없지만, 반드시 1층이어야 한다. 규모는 보통 동네 서점의 두 배에서 세 배쯤이면 적당하겠다. 문학, 예술, 인문서적들을 주로 진열하고 중고등학교 참고서는 팔지 않을 것이다. 대신 아이들과 엄마들을 위한 코너를 갖출 것이다. 어떤 색의 책장을 맞춰 어떻게 진열할 것인지, 간단한 차와 케이크, 떡과 한과를 먹을 수 있는 공간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 어떻게 그 서점만의 베스트 20을 만들어 주마다 갱신할 것인지, 멤버십 카드와 뉴스 레터를 어떻게 제작해 운용할 것인지.......하는 사소한 계획들을 나는 노트 가득 적어놓고,도면까지 완성해놓았다. 물론 서점의 이름도 지워뒀다.......그 서점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매주 금요일 밤 8시 30준부터 열리는 소설과 시 낭송회다.....낭송이라면 으레 시 낭송을 떠올리지만, 시보다 오히려 흡인력 있는 것이 소설 낭송이다. (119-120쪽)
그렇게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정신이 허공에서 에너지로 만나는 순간, 텍스트와 목쇨, 감정과 표정이 한덩어리가 되는 순간을, 그 시절 그 숱한 낭송회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경험할 수 있었을까. 그 작은 도시에서, 서툰 영어로, 연고도 전혀 없던 내가 그 생활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문화적으로 풍요한 공기-지금의 서울보다 숨쉬기 편안한-때문이었다는 것을 결국 나는 부인하지 못하겠다. (123쪽)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놀란다. 갑자기 찾아온 봄 때문이다. 왜 봄은 올 때마다 기적처럼 느껴질까. 그토록 오래 기다린 뒤, 거의 체념하고 있던 어느 날에야 홀연히 우리 앞에 돌아와 있는 것일까. 물론 겨울 또한 아름다운 계절이다. 겨울 숲 안에 서 있자면 그 침묵 속에 가득 차 있는 우주의 신비가 고스란히 전해져 올 때가 있다. 더구나 차가운 바람은 머릿속을 깨끗하게 씻어준다. 겨울길을 한 시간만 걷고 나면 모든 욕망과 후회 따위가 정화되고 그 자리에 정신이 번쩍 나는 삶의 감각이 돌아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겨울이 나에게 태반은 `견뎌야 할 시간`에 해당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133쪽)
그런가 보았다. 우리는 좀더 쾌적한 집과 좀더 많은 수입, 좀더 나은 생활을 동경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는가 보았다. 정말 귀중한 것은 값나가고 어려운 것들이 아니라, 숨쉬는 공기와도 같았던 것들, 가장 단순하고 값나가지 않는 것들, 평화, 우정, 따뜻함 같은 것들이었나 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귓바퀴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던 이 진부하기 짝이 없는 진리가 어느 날 가장 생생하고 낯선 메시지가 되어 가슴에 꽂힐 때, 그때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는 것인지. (138-139쪽)
모든 기억들이 단편으로 부서지고, 형태를 잃어간다. 조용히, 시간의 풍화 속에 흩어진다. 나는 흥얼거린다. 나는 기억하는 사람, 모두가 잊은 것들을 기억하는 사람,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을 때까지, 다만 그때까지. 내버려둔다. 새벽 안개가 습한 땅으로 내려앉듯이, 차창 밖으로 풍경들이 조용히 멀어지듯이, 내버려둔다. 애써 돌이킬 필요는 없다. 다만, 그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는 것들, 결코 완전히 펼쳐 보일 수 없는 것들...... 그 색채, 소리, 시가느이 질감, 숱한 감정들, 조용히, 한없이 조용히 사라져가는 것들을.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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