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주위에는 속세로부터 멀리 헤엄쳐 나가 뭇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배수진을 치고, 황홀과 고뇌의 기도를 올리는 자들이 가끔 있다. 그들은 속인들의 기억 속에 안온히 소일하는 것보다는 수시로 비참과 횡포의 자연에 뛰어들어 기꺼이 무가 되려 한다. (9-10쪽)
시는 우리가, 세계 속에 묶여 있는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자유, 그 자유의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러므로 시에 대한 어떤 사변적 논의도 정당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63-64쪽)
무엇보다 시는 우리와 세계의 새로운 관계 맺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는 새로운 각도에서 사물의 의미를 되찾도, 그로 인해 우리 자신의 의미를 되찾게 합니다. (65쪽)
그러니까 시는 어떤 기발한 이미지가 아니라 이 진행, 이 살아 있음의 순간적인 양태가 시입니다. 우리는 어떤 내용을 이미지로 바꿀 수도 있고, 혹은 바꾸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힘`입니다. 한 이미지를 다음 이미지로 연결시켜 주는 것은 이 살아 있는 힘이며,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면 이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달리 말해 무한히 자유롭고 싶어 하는 우리들의 열망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다시금 `우리가 살아 있다`는 그 사실에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우리 삶은 훼손되어 있습니다. 삶은 부족하고 부자유스러운 것이며, 행복은 오직 이미지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쓰게 됩니다. (66쪽)
`시`는 우리가 끝내 파악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우리가 쓰는 시는 우리와 현실의 타협점일 뿐이지요. (68쪽)
한 편의 시가 주는 감동은 어떤 사회적 현실이 시인의 의식 내부에 불러일으킨 감동으로 독자에게 전달될 때 생겨나는 것이지, 사회적 현실 자체에 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75쪽)
그러니까 시가 얼마만큼 땅으로 내려설 수 있는가, 또 거기서도 시가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저의 관심사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시인은 어떻든 자기가 발 딛고 있는 현실사회 속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시인이 이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눈 감으려고만 할 때, 시의 운명은 걷잡을 수 없는 것이 될 것 같아요. 저는 공동체라든가 현실사회를 우리가 들어가야 할 문으로 생각해요. 우리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지, 문을 등에 지고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술은 현실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현실을 통해 해방이지요. (81쪽)
현실. 유일한 스승이며 길잡이. 지금까지 내 문학의 실패와 앞으로 내 문학의 갱생의 실마리는 현실에 있다. 아무리 반복해도 모자랄 정도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현실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현실에 대한 `관심`이다. 그 관심이 현실을 현실로 존재하게 한다. 정말 내가 문학하기를 바란다면, 지금부터라도 문학 얘기는 집어치워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아편처럼 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문학에 매달리지 말고, 현실 앞에 마주 서서, 현실과 부딪치고, 현실을 넘어서야 한다. 물론 지금 나에게 현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습관에 의해 박제되고 관념으로 경직된 현실이다. 깊은 의미에서의 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끈질긴 관찰이 필요하고, 관찰로 이끄는 관심이 필요하다. 사랑의 다른 이름인 관심은 `삶에 대한 탐구` 혹은 `죽음에 대한 준비`의 원동력이다. (96쪽)
어쩌면 시의 품성은 실사보다는 허사, 명사나 동사보다는 전치사와 접속사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텅 빈 말들이 사물들과 사건들의 가랑이를 벌려 놓는 단단한 쐐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126쪽)
하루에도 수만 개씩 바뀌는 우리 몸의 세포처럼, 마음도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인데. 그 많은 마음들이 한 마음으로 보여지는 것은 너무 빨리 바뀌기 때문이라지요. 모래시계에서 흘러내리는 모래나 열 지어 가는 개미들이 멀리서 보면 연속된 띠처럼 보이는 것처럼 말이에요. "마음을 새로 내서, 앞의 마음을 뒤의 마음이 보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대상과 싸우게 된다"는 말씀도 전도망상의 근원이 되는 `마음과의 동일시`를 경계하는 것이지요. (135쪽)
우리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고, 하물며 아내나 자식이나 친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 그러나 명명백백히 존재하는 어떤 것.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전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마치 사랑을 나누는 두 남녀가 상대의 쾌감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저는 그것이 언제나 잴 수 없는 깊이로 우리 삶 속에 존재한다고 봅니다. 정서적인 차원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일 수 있겠고, 의식적인 차원에서는 정치. 사회적인 현실이 될 수도 있겠고, 무의식적 차원에서는 맹목적인 생의 본능과 원죄로 밖에 돌릴 수 없겠지요. (141쪽)
시를 읽는 것은 읽는 사람 자신의 삶을 읽는 것이다. 시는 우리가 미처 짐작하지 못한 진실에 눈뜨게 해 준다. 우리 삶은 미세한 실핏줄들로 얽혀 있다. 나날의 습관과 고정관념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 실핏줄들은 끊임없이 삶에 영양을 공급하고 노페물을 실어 나른다. 시를 쓰는 것은 바로 그 미세한 혈관들의 지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163쪽)
나는 다 채워지기를 바라는데 삶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다 채우기를 포기할 때 삶은 우연히, 뭐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채워 주기도 한다. 그것이 삶의 너그러움이다. 그것이 나의 조급함과 애살에 대한 삶의 처방이며 훈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이 큰 욕심이기도 하지만 크게 나무랄 일은 못 된다. 왜냐하면 그 욕심이 없었다면 어떻게 삶의 충고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으며, 받을 수 있기를 소망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삶에 바쳐야 할 예의이며 도리라고나 할까. 아무래도 나는 삶을 믿지 못하는가 보다. (206-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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