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몇 시간의 기차를 타고 읽은 글이다. 상큼하고 깔끔하다. 오가는 길은 멀고 힘이 들었다. 몸이 무겁고 아팠다. 한주 내내 몸과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불편하고 힘든 감정을 마주하기 싫어 쉴새없이 아이들을 만나서 애써 아닌척 모른척 했다. 관계에서 파생된 감정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상대의 감정이 태반이고 결정하는 이도 상대가 해야 하는데 자꾸 내가 관여하려 한다. 타인의 감정을 읽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을 좌지우지 할 수는 없다. 이 부분의 경계가 애매하다. 어떤 이는 일일이 알아봐 주기를 원하고, 어떤 이는 손내밀 때 잡아주기를 원한다. 어떤 관계냐에 따라 한참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나때문에 파생되어 시작된 감정이지만 그 감정을 용인하고 받아들인 것은 너이기에, 결정은 너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면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 될까. 애증이 섞여서 쌓인 해묵은 감정까지 끊어내고 정리하는 건 어려울테지만. 스스로 선택하여 건너오는 그 마음을 갖고 싶다. 혼자서 설 수 있는 걸 도와 주고 싶다.
나의 짬뽕같은 머리와 감정에 비하면 이태준의 두서없이 기록했다는 글에는 군더더기 하나 없다. 나의 상황과 글과의 큰 괴리, 이열치냉으로 다스리며 읽었다.
"그의 수필에서는 반세기의 세월을 무위하게 할 만큼 마치 방금 따온 과일과도 같은 신선한 빛과 향기가 숨이 막히도록 풍기는 것이다. 철 지난 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케케묵은 군내나 빛바랜 흔적이 전연 없고, 시체 사람이 쓴 글을 읽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조차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고작 30대의 나이로 이룬 글인데도 그 원숙한 관조의 세계와 심오한 경지, 동양적 수필의 진수로 삼는 관조와 경지를 그는 불과 30대의 나이에 터득한 것이다. (187쪽, 박재식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