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록 범우문고 109
이태준 지음 / 범우사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오래 살고 싶다.
좋은 글을 써보려면 공부도 공부려니와 오래 살아야 될 것 같다. 적어도 천명을 안다는 50에서부터 60, 70, 100에 이르기까지 그 총명. 고담의 노경속에서오래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인생의 깊은 가을을 지나 농익은 능금처럼 인생으로 한번 흠뻑 익어보고 싶은 것이다. (20-21쪽)

국화를 위해서는 가을밤도 길지 못하다. 꽃이 이울기를 못 기다려 물이 언다. 윗목에 들여놓고 덧문을 닫으면 방안은 더욱 향기롭고 품지는 못하되 꼬초가 더불어 누울 수 있는 것. 가을밤의 호사다. 나와 국화뿐이려니 하면 귀뚜리란 놈이 화분에 묻어 들어왔다가 울어대는 것도 싫지는 않다. 가을꽃들은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모른다. 찬 달빛과 늙은 벌레 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또한 명예이다. (39쪽)

다른 것끼리가 늘 즐겁다. 돌멩이라도 다른 것끼리는 어느 모서리로든지 마찰이 된다. 마차렝서 열이 생기고 불이 일고 타고 하는 것은 물리학으로만 진리가 아니다. 이성끼리는 쉽사리 열이 생길 수 있다. 쉽사리 탄다. 동성끼리는 돌이던 것이 이성끼리는 곧잘 석탄이 될 수 있다. 남자끼리의 십 년 정보다 이성끼리의 일 년 정이 더 도수를 올릴 수 있는 것은 석탄화 작용에서 일 것이다. 타는 것은 맹목적이기 쉽다. 아무리 우정이라 할지라도 불이 일기 전까지이지 한번 한끝이 타기 시작하면 우정은 그야말로 오유가 되고 만다. 그는 내 누이야요. 그는 내 오빠로 정한 이야요 하고 곧잘 우정인 것을 공인을 얻으려고 노력까지 하다가도, 어느 틈에 실화를 해서 우애는 그만 화재를 당하고 보험들었다 타오듯 하는 것은 부부이기가 일수임을 나는 허다하게 구경한다. (61쪽)

나무들은 아직 묵묵히 서 있다. 봄은 아직 몇천 리밖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나무 아래 가까이 설 때마다 나는 진작부터 봄을 느낀다. 아무 나무나 한 가지 휘어 잡아보면 그 도틈도틈 맺혀진 눈들. 하룻밤 세우만 내려주면 하루아침 따스한 햇발만 쪼여주면 곧 꽃피리라는 소근거림이 한 봉지씩 들어있는 것이다. 봄아 어서 오라! 겨울나무 아래를 거닐면 봄이 급하다. (106쪽)

한 시간 뒤에는 잇짚 지붕들도 흰 빨래 울타리들도 다 사라졌다. 맷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타박거리는 내 발소리뿐. 나는 몇 번이나 발소리를 멈추고 서서 귀를 밝혀보았다. 아무 소리도 오는 데가 없었다. 그 유구함이 바다보다도 오히려 호젓하였다. (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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