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이것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드물다는 것. 대개는 먼저 사랑을 시작하는 한 사람이 있고, 그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를 요구받는 다른 한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사랑(넓은 의미에서 관계의 논리학)을 탐구하려면 두 개의 물음을 따로 물어야 한다. 도대체 어떤 구조 속에서 A는 B에게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가. 그리고 어떤 조건이 갖춰질 때 B는 A에게 "나도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게 되는가. 이 두 물음 중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후자다. 왜냐하면 내가 어쩌다 너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라는 물음은, 내가 너와 `이미` 사랑에 빠진 이후에 던져지는 한에서는, 물음으로서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근본적으로 동어반복에 가까워지고 말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된 것은 네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 놀라운 것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나의 사랑에 응답하게 되는 일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상황 혹은 조건 속에서만 타인의 사랑에 기꺼이 응답하는가?` (18쪽)
즉 타인의 사랑이 내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에 응답하게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내가 내부의 결여를 인지하는 데에는 나를 둘러싼 외적 조건들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 외적 조건들의 퍼즐이 때마침 어떤 조합을 이루는가 하는 문제는 거의 우연에 속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랑의 논리학도 결과를 확언할 수 있는 정도로까지 정교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우연을 다 통제할 수는 없으므로. (20쪽)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결여를 깨달을 때의 그 절박함으로 누군가를 부른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가장 간절한 말, `나도 너를 사랑해`라는 말의 속뜻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결여다.` (25쪽)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27쪽)
두 사람의 차이가 상호 매혹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동일한 차이가 결국 그 관계를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 (33쪽)
사랑이 실패한 것은 내가 타자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 진정한 문제는 지금 타자를 잃어버렸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내가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된다. (46쪽)
세 종류의 고통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것. 자주 고장 나고 결국 썩어 없어질 `육체`, 무자비한 파괴력으로 우리를 덮치는 `세계`, 그리고 앞의 두 요소 못지않게 숙명적이라 해야 할 고통을 안겨주는 `타인`이 그것들이다. (117쪽)
진실은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 능력은 때로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어 발현될 수 잇다는 것. 그를 통해 인간은 서로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것. (129쪽)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진실 자체가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이다. 진실로도 설득할 수 없는 것을 무슨 수로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타인들과 더불어 사는 인간의 삶에서 이것보다 더 절망적인 결론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네가 누구건, 무엇이 진실이건, 그것은 우리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네가 유죄라는 것이다.` (131쪽)
시야말로 `마음`과 특권적인 관계를 맺는 장르라는, 꽤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 그 관념을 이 영화는 거의 전적으로 수용한다. 시는 마음의 투명한 재현을 추구하는 1인칭의 독백이다. 시에 어떤 화자가 등장하건 그는 곧 시인 자신이다. 그러므로 거짓된 삶에서 진실한 시가 나올 수는 없다. 삶과 시는 일치되어야 한다, 라는 명제들이 그 관념을 구성한다. (136쪽) *이 영화 = 이창동감독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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