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의 연인들 - 소설로 읽는 거의 모든 사랑의 마음
박수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은 낭만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무성한 소문 혹은 신화와는 다른 사랑의 나체, 초라하지만 진실한 알몸, 슬프기 짝이 없지만 슬픔의 존재를 알아야 담담해질 수 있다. 인생에 슬퍼하지 않으려면 인새잉 원래 슬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허술하고 누추한 국면을 알아야 비탄을 거둘 수 있는 법이다. (15쪽)

진행되는 연애에서 두 사람의 자아의 장벽은 얼마나 두터운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처음에 베일에 가려졌던 상대의 마음은 점점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실체를 드러낸 상대의 마음속에는 `나`와는 너무도 다른 것들만이 웅성거리고 있다. 문제는 상대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초기의 장벽이 `알 수 없는 너의 마음`과 `좌충우돌 상상만 하는 나` 사이에 세워진 것이라면, 진행 중인 연애에서의 장벽은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 너`와 `너를 변화시켜야만 살 것 같은 나`사이에 축조된다. (29쪽)

사랑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가능한 답들은 꽤 있다. 말, 고독, 설렘, 성욕, 불안, 의심, 질투, 결핍 등. 하지만 내가 보기에 모범답안은 시간이다. 사랑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시간을 견디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에 값하지 못한다. (107쪽)

사랑은 아닌데 나를 성가시게 하는 것, 내 마음을 분주하게 하고 때로 혹사시키는 것, 이런 것과 사랑과의 거리는 상당히 가깝다. 사랑의 옛 우리말이 상다라는 말이 있다.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사랑이란다. 단지 그 사람을 그리워해서 생각을 많이 한다는 뜻만은 아닐 터이다. 어떤 식으로든, 의아함이든 미움이든 짜증이든 누군가에 대한 상념이 많아지면, 그것은 사랑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래서 가장 흔한 사람의 고백은 이렇다. 너 때문에 신경이 쓰여 죽겠어! 근본적으로 사랑은 리비도의 집중 현상이다. 어떤 모양으로든 집중된 에너지는 사랑으로 흐르기 일보 직전이다. (168쪽)

명료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감정은 절대로 명명백백하지 않다. 그것은 혼돈과 의심과 불안의 외피를 쓰고 기습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의 감정뿐만 아니라 제 감정도 끊임없이 의심한다. 감정의 정체를 심문하는 검사에게, 정직하게 답변할 말은 여간해서는 찾을 수 없다. 미움, 의존심, 성욕, 집착, 의심, 불안, 강박, 이런 인접 감정들과 사랑을 명쾌하게 가르는 선은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사랑과 그 인접 감정들이 복잡하게 뒤얽힌 혼돈 덩어리를 정의하고 분류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197쪽)

욕망은 결국 타인과 상관없이 원래부터 `내`안에 있었던 `나`의 욕망이다. 타인을 욕망하는 사람은 타인 자체가 아니라 자기안의 욕망을 욕망한다. 타인은 내 욕망을 환기하는 매개이자, 내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이다. 가령 내가 연인에게서 판타지를 구하려고 할 때, 연인은 단순히 내 판타지를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된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연인을 욕망한다기보다 연인을 매개로 나의 판타지를 실현하려고 한다. (243-244쪽)

또한 우리는 상대에게서 `나와 닮은 것`을 찾는다. 종종 우리는 상대 안의 나에게 매혹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 소망과 내 결핍이다. 우리는 내가 가지고 싶은 자질을 가진 그, 내 소망을 실현한 듯한 그를 사랑한다. 박식해지고 싶은 사람은 박식해 보이는 그에게 매혹된다.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성공한 듯 보이는 그에게 매혹된다. 제 결핍을 의식하는 사람은 유사한 결핍을 가진 듯 보이는 그에게 매혹된다. 누군가 묻는다. 그에게 왜 반했니? 그는 상처받기 쉬운 어린 아이 같아. 이때 생략된 말, 그러나 가장 중요한 말은 `나처럼`이다. 나의 현실, 내 소망과 결핍은 상대에게서 매력을 생산해내는 발전기다. 나의 소망을 투사할 때 나는 상대를 예찬한다. 나의 결핍을 투사할 때 나는 상대를 안쓰럽게 여긴다. 상대의 매력의 원천은 `나`이다. (262-263쪽)

알랭 바디우에 다르면, 사랑은 "불가능한 무엇처럼 나타나게 만드는 무언가를 극복하는 것"이다. 사랑은 불가능을 극복한다. 이렇게 말해도 될 것을 그는 복잡하게 말했다. 극복해야 하는 것은 불가능이 아니라, "불가능한 무엇처럼 나타나게 만드는 무언가"란다. 이 무언가가 무엇인가. 무엇을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것, 즉 무엇이 불가능하다고 믿어버리는 나약하고 비관적인 마음이다. 견고한 두 자아의 치명적인 차이를 극복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상대의 충격적인 배신을 용서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관계의 숙명적인 균열을 메꾸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가능하다고 믿는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사랑이란다. (29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