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명의 여성 멘토를 만났다.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제약을 갖는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배제되고 또한 남성, 연인에게 조차 함께, 동지라기 보다는 보조, 도와주는 이로 자리 매김이 된다. 이러함에도 그녀들의 공통점은 책이다. 책속의 인물들을 만나 그들의 문제에 동참하고 재현하고 탐구해서 현실로 나왔다. 현실에서 싸우고 진보하고 실천해 나아갔다. 거기에는 감히 여자주제에 라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사랑은 제인오스틴과 주드주 상드을 통하여, 내몸의 주인공은 사강으로, 얽매이지 않는 관계의 가능성은 실비아 플라스로, 외로운 인생은 버지니아 울프와 바흐만의 이야기로, 사회와 국가의 금지된 것에 대한 조금의 반항은 로자 룩셈부르크로, 타인의 아픔에 울수 있고 자신의 존재방식은 손택의 글에서, 아주 평범한 우리가 몰랐다, 모른다는 미명하에 저지를 수 있는 수많은 악의 형태들은 한나 아렌트로, 여자들의 진정한 독립, 특히, '남편과 남의 편(타자)들의 시선 속에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272쪽)'에서 진짜 자기 찾기는 시몬 드 보부아르에서 배워야 한다. -그녀들의 사랑과 관계와 주장과 혁명은 남성들이 지르는 소리보다 몇백배나 커야하고 천둥 벼락같은 방법으로야 세상이 듣고 알게 된다. 그렇다고 제대로 알아 듣는게 아니라 감히 그런 주장과 혁명을 하다니, 그녀들은 힘들게 하는 외부의 타자를 죽이는 게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방법까지 택하게 된다. 나 또한 그녀들을 따라갈 수 없다. 지금의 삶에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죽을 만큼의 고통없이는 지금 이자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조금의 움직임도 아파야 가능하다. 멘토들의 말이 귀에 들릴지라도 나의 아픔이 크지 않으면 닿지 않는다. 기꺼이 현상을 알아야 되는 부분도 있다. 그런데 그 알아야 되는 거 조차 하고 싶지 않다. 그만큼 현실에 안주해 있고 불편을 감수하는 게 싫다. 지금 가지고 있는 부분을 버리고 싶지 않고 유지하고 싶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손택의 '우리의 겉모양새가 사실은 우리의 존재방식(203쪽)'이라는 스타일과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보부아르의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의 실존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서는 몇번 곱씹어 볼 생각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씩 삶의 모양을 바꿔가도록 노력을 하겠다. 끄적하다 보니, 데모를 했던 젊은 시절과 지금의 아이들 모습이 떠오른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삶이 달라졌으니, 주장도 이념도 달라야 하나. 잘 모르겠다. 그래도 모두 함께 잘 사는 방향으로 연대하고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개개인의 삶에 초점이 간다. 내가 나의 위치를 좋은 곳에 잡고 잘 살기 위해서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