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 장석주의 문장 예찬 : 동서고금 명문장의 치명적 유혹에 빠지다
장석주 지음, 송영방 그림 / 문학의문학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와 감미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훌륭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사실 감정을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거다), 경험이기 때문이다. (15쪽)

몸은 오래된 기억들, 너무 오래되어 잊힌 기억들의 창고다. 그 기억들은 대개는 무의식의 저 깊고 어두운 곳으로 내려간다. 무의식은 깊은 자아다. 그것을 꺼내 써야 한다. 마치 무의식에 빙의된 것 같은 느낌으로 글을 써야 한다. 손끝은 펜촉이다. 그 펜촉을 통해 무의식의 검은 잉크가 흘러나온다. 글은 한없이 흘러나온다. (22쪽)

그는(김현) 시를 읽을 때 시인의 의도를 찾아내기보다 제 욕망의 윤리학을 겹쳐 그 시를 읽어 내곤 했다. 그는 시를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시를 하나의 생물로 품어 안으며 그것과 교접한다. 그 교접의 현실태는 도취와 공감이다. 그는 시 속에서 행복을 꿈구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아무도 그가 했던 만큼의 풍요한 비평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51쪽)

나는 독서를 앎을 추구하고 넓히는 방법으로보다는 인생의 낙으로 즐긴다. 책읽기는 아무리 계속해도 타성의 완고함에 빠지지 않는 일이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내면의 사람이 나날이 새로워진다......
책읽기의 욕망 저 밑바닥엔 세월과 더불어 늙어가는, 점점 짧아지는 생명의 금을 늘려 보려는 불가능한 꿈이 있는 것일까? 책읽기가 생자필멸의 운명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나이 든 자의 근엄함을 엷게 만들고, 잃어버린 어린애의 천진난만함을 되찾게 한다.....
내가 오랜 세월을 책읽기로 보내는 것은 독서 외의 다른 큰 즐거움이 없기 때문일 것이며, 책에서 `덕`과 `지`를 구하려는 마음은 그 다음이다. (78-79쪽)

살아남음은 온갖 위험 요소들을 누르고 없앴다는 뜻이다. 위험의 본질은 곧 죽음이다. 내 살아남음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남이 아니라 내가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죽여야 한다! 이것이 삶의 조건이다. 생명의 불가침성 따위는 무시해야 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계속 살아남으면서 다른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을 수 있는가? 내면에 이런 물음이 없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짐승들이 사는 곳과 다를 바 없다. 아무리 온화한 형태로 살아남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다른 생명체의 밥이 되지 않고 다른 생명체를 밥으로 취했다는 증거이니, 그것은 짓지 않은 원죄의 징표이고, 부끄러워해야 할 근거이며, 항상 겸허하게 살아야 할 까닭이다. (102쪽)

좋은 건축은 사람의 필요와 욕망에 대한 응답이며, 그것을 넘어서서 미적 이상향을 향한 오랜 꿈의 실현이다. 그때 건축은 취향과 실용적인 기능의 영역이 아니라 숭고의 관점에서 다루어져야 할 철학적 대상으로 바뀐다. (156쪽)

몰입은 삶의 현재성에 `네`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현재성이 그러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186쪽)

고요한 순간을 주목하라. 하나의 생각이 가고 또 하나의 생각이 아직 다가오기 전의 고요한 순간, 대화 중 생겨나는 짧고 고요한 공백, 피아노나 플루트 연주곡을 들으면서 음과 음 사이에 존재하는 고요한 순간, 그리고 들숨과 날숨 사이에 존재하는 고요한 순간을 주시하라. (188쪽)

아주 긴 시다. 오동나무가 되어 네 무릎 위에서 울리는 금이 되고 싶구나, 했다. 나도 누군가의 무릎 위에서 울리는 거문고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다. 그래서 튕겨져 올리는 음률마다 누군가의 애간장을 끓게 했던가. 마음에 간절한 바는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 예나 지금이나 연애에 빠진 사내의 모습이란 게 이렇듯 제 마음의 갈피를 다스리지 못한 채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일삼고 궁상맞구나, 하며 공허하게 웃는다. 나이가 적거나 많거나,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사랑에 빠지면 공연히 근심하고 마음에 괴로움은 가득해지고 행동은 나날이 유치해지는가? 내 마음도 누군가 그리운 이를 품으면 물렁물렁해져 유치해질까? 분명 그럴 것이다. (236-237쪽)

문드러지고 스민 것도 세월이 가면 바래지고 삭혀져 별일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무등을 보며]의 사랑은 바로 그런 사랑이다. 떫지도 시지도 않은 사랑, 소태처럼 쓰지도 않고 연시처럼 달지도 않은 사랑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곳에 저 혼자 처박혀 빛나는 옥돌 같은 사랑이고, 샘물처럼 천천히 차오르는 사랑이다. (296-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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