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작가 - 43인의 나를 만나다
장정일 지음 / 한빛비즈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자신이 범한 잘못을 `시련`으로 치환한 뒤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이 어린 학생은 능동성으로 무장한 윤리적 자기계발의 화신이자, 자기 속의 부정적 그늘을 완전히 말소한 것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신비적 자기계발을 완수한 구루Guru가 아닌가? (20쪽)

일반적인 저널리즘 사진이 장면의 맥락 이탈을 감행했으면서도 원래의 맥락을 이어 붙여야 한다는 친절하고 강박적인 속성을 버리지 못하는 반면, 저널리즘의 경계를 오락가락하는 노순택의 작업은 채집한 장면의 "맥락을 끊기도 하고, 엉뚱한 데 갖다 붙"이기도 한다. 그 겨로가 저널리즘 사진이 정보 제공을 통한 마침표(.)를 제시한다면, 그는 미심쩍음을 통한 물음표(?)를 추구한다. (38쪽)

지금의 정치 위기가 계속되면 중간층의 부동층화되고 이로 인해 정치 위기가 심화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 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치권은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수수방관한다. 왜냐하면 정치권은 자기 지지 기반을 결속시키는 일 못지않게 상대방 지지 기반을 이완시키는 일이ㅔ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그럴 때, 정치적 무관심과 불신, 협오를 확산시키는 것만큼 더 좋은 수단도 없다. 이런 설명을 들으니, 종편이 생기면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정치 토크쇼의 저질 시비와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정치평론가들의 천한 화술과 논리가 절절로 떠올랐다. (48-49쪽)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그것을 감추고 있지만, 인간이 본질적으로 성공하고 잘되는 것은 누군가의 몸에 상처를 내고 그를 딛고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가족 간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71쪽)

절실한 글쓰기란 내가 당면해 있거나 미구에 닥치게 될 문제, 혹은 주위의 누군가가 겪고 있거나 나 또한 피해갈 수 없는 구체적이고 절실한 것에 대해 생각을 가다듬는 일이다. (97쪽)

절실함이 더해지고 희생이 전제되어야 원하는 물건은 내 것이 됩니다. 좋아하는 물건이 있다면 우선 저질러 놓고 나중에 해결 방법을 찾는 게 내 방식입니다. 재미잇는 것은 이런 방식이 욕망과 현실을 외려 중화시켜 놓더라 이겁니다. 저질러 놓은 것을 수습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하니, 간절한 욕망부터 해결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지론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욕망 충족법을 지켜 오니 이제 절시랗게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물건도 별로 없게 되고 외려 욕망의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하더군요. 뭐든 대체하면 된다는, 대치의 관점에서 사는 인생이 쓸쓸하다는 얘기는 이래서 가능한 거죠. 난 스스로 선택한 고립의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혼자 노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명품을 의식한 게 아니라, 좀 더 세밀하게 나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해체하는 놀이 도구가 바로 물건이었던 셈입니다. 기왕이면 좋은 물건을 선택하려는 노력은 정당했고 좋은 물건은 그만큼의 대가를 내게 돌려주었습니다. (107-108쪽)

미술은 일반 상품과 달리 정신적으로 즐길 수 있을때 비로소 상품이 됩니다. 삶에 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본질을 일깨우는 미술을 즐기면 자연스럽게 미술품이 좋은 상품이 된다는 것. 그리고 미술시장이란 게 경제적 여유가 있는 소수에 의해 형성되고 유지되긴 하지만 더욱 많은 사회 구성원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크게 성장할 수 없다는 게 진짜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128쪽)

희곡의 매력은 두 시간 안에 인생과 세계를 압축해 보여 주는 `압축의 맛`에 있습니다. 관객은 극장에 와 있는 두시간 동안 우리를 둘러싼 삶과 세계는 물론이고 거기서 일어나는 일을 통찰하고, 일상 속에서 깊이 고민하지 못했던 모럴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146-147쪽)

"만일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도 상대방의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그대 자신을 동시에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사랑이요 하나의 불행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81쪽)

훈구와 사림은 도덕적 선악의 대립 구도가 아니라, 대신(의정부, 육조)과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라는 각 관서의 고유 임무와 관직 체계에서 비롯한 직능상의 대립이라고 보아야 도덕적 이분법으로만 재단되지 않는 조선 정치의 전모가 보입니다. (198쪽)

유학이 권위에 순응하는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약점은 인정합니다. 유학에서 건져야 할 가장 귀중한 거싱 있다면 사람 사이의 공감에 기반한 윤리며, 누구나 끊임없는 자기 경계와 반성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인간성에 대한 믿음입니다. 유학에서의 `자신`이란 수신에 머무는 것도 가문에 귀속되는 것도 아닌,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퍼져가는 곳까지입니다. 자신의 관심과 염려가 자기가 사는 마을까지 퍼져싿면 그의 자아는 그 마을만큼이고, 이 세상 끝까지 미친다면 그와 세상의 크기가 같습니다. 맹자는 자신의 측은지심을 세상 끝까지 뻗게 한 사람이고, 세상 끝까지 미친 그 마음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정치를 생각했습니다. (220쪽)

오리엔탈리즘이란 서구가 자신의 동양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양을 계몽되어야 할 여성이나 어린이로 보는 시각이다. 인식론적 폭력으로 확대 설명되기도 하는 오리엔탈리즘의 문제는, 서구에 먼저 개항한 대가로 다른 동양 국가보다 한 발자국 앞서 서구화된 동양 국가가 자신의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을 흉내낸다는 점이다. (233쪽)

익히 알다시피 서구 제국주의자의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타자화해서 바라보면서, 서양은 남성에 비유하고 동양은 여성에 비유했다. 이를테면 변덕스럽고 무질서하며 자연 상태의 동양(여성)은 이성적이고 문명화된 서양(남성)의 지배를 받는 게 순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서구 제국주의자의 동양 침탈 논리였다면, 앞선 개항과 근대화를 통해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고스란히 답습한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는 논리 구조도 그것과 동일했다. (290-291쪽)

각자에게 좋은 책은 그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책이죠. 그렇게 되어야 하죠. 그런데 말씀하신 것처럼, 나의 욕망이 나의 거싱 아니듯, 나의 절실함도 나의 것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딱히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의 문제만이 아니라서 제 능력에 부치는 질문입니다. 단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누가 만들어 놓은 `고전 리스트`가 그 누구에게는 좋은 책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기를 바랍니다. (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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