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 6 - Listening to the space 여행, 음악 어떤 날 6
강윤정 외 지음 / 북노마드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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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기가 끝나고 그 시기를 더이상 돌아보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조금 더 성장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마 내내 미숙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기를 떠올리며 키득키득 웃고, 또 작게 한숨 쉬는 너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덩달아 웃거나 애틋해하거나 하고 있자니 왠지 마음이 든든했다. 즐어드는 가능성과 좁아지는 선택지들 사이에서 때때로 갈팡질팡하는 삼십대가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 꼬박꼬박 살아와 이만큼의 기억, 이만큼의 웃음과 한숨을 가지게 되었구나, 장하다 우리, 하는 마음. (26쪽)

이 원고를 쓰기 시작하고서야 내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추억들이 현재에 가까울수록, 그러니까 역순으로 더욱 뚜렷하다는 사소한 발견을 했다. 일상에서 함께 보낸 아주 작고 무수한 순간들, 우리가 서로를 알게 된 첫 순간 같은 것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선명해지지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좌절했지만, 다시 문득, 그렇다고 이 앨범을 거꾸로 뒤집어 들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71쪽)

궁금하다, 진짜라는 음악이 듣고 싶었던 게 대체 언제인지, 아니 진짜, 라는 데 진짜 관심이 가던 때가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 이 도시는 그런 걸 생각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야, 허세스럽게 차려입고 한 손에 커피를 든 채 관광객 따위 아닌 척 바쁘게 걸으며 누군가 몰래 날 찍어 인스타그램 해주기를 기대하고 살피는 거. (86쪽)

하루에 한 시간으로만 쳐도 천 시간을 넘게 걸어다닌 길이라 그 길에 얽힌 별것 아닌 추억들이 많다. 딱 음반 한 장만큼의 길이였던 그 길. 그 길 자체가 추억의 음악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추억이 쌓인 길이 있다는 건 나쁘기 않다는 느낌이다. (123쪽)

첫 시집을 내고 난 다음해 겨울이었다. 이전과 같은 것은 쓸 수 없었다. 이전과 같은 것은 쓰기 싫었다. 멀리멀리로 떠나고 싶었다. 멀리멀리로 가면 무언가 다른 것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떨어지려면 멀리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심리적이고도 상징적인 거리를 넘어서서 몸으로 뚜렷이 각인될 수 있는 물리적인 거리를 건너가고 싶었다. 머나먼 시베리아라면, 그 혹한의 땅이라면, 무한한 무언가를 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급히 넘겨야 할 원고들을 넘기고, 써야 할 원고들을 가방 깊숙이 챙겨넣고, 시베리아로 떠났다. 끝없는 설원 위를 끝없이 다릴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생각하면서, 눈보라 휘몰아치는 정적 속의 자작나무 숲을 떠올리면서, 마음으로는 이미 미지에서 흘러드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언어라는 구체적인 외피를 입지 않았다는 점에서 음악은 무한에 가깝게 느껴졌다. 언어를 넘어선 곳에서 끝없이 열리는 곳. 그곳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장면들, 무수한 목소리들. (165쪽)

누군가를 견딜 수 없이 사랑한다는 건 레몬을 깨무는 일,
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 향기롭지만 너무 깊게 물면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나를 아리게 하는 것.
하지만 그 고통이 싫지는 않은 거야.
나를 눈물 나게 하지만 충분히 향기롭고,
가지고 싶게 하거든 사랑이란. (191쪽)

우리에게 반딧불이는 하나의 은유, 특히 희망에 대한 은유였다. 끝없이 운동하면서 자유를 누리는 것, 고리빙 아닌 것, 희미하지만 사랑할 때만 깜빡거리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을 추는 것, 사라지면서 빛을 남기는 것,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경탄스러운 인간성과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본능 같은 것.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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