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가고 싶은 날, 아뿔사 휴관이다. 돌아 돌아 들어와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신경림이 소리내어 읽고 싶은 시를 가만히 조용히 읽었다. 최영미와 김용택 시는 소리 내어 몇번을 읽었다. 이미 지나간 사랑을 생각하는 시였다. 계속 읽어 온 정여울의 글들과 연결되었다.

  

이성복의 시, [편지]에서 가져온 ‘잘 있지 말아요’를 가을방학의 노래와 정여울의 글로 읽었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게, 모든 것의 ‘첫’에 해당되는 운명이다. 가끔은 나의 첫에 해당되는 모든 게 잘 있지 말았으면 조금 삐딱하게 있었으면 한다. 이렇게 찬바람 불면 같이 떨었으면 했다. 그러다 그러면 안돼와 그럴 수 없어로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라는 가을방학 노래로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했다.

정여울의 글은 삼백페이지 넘게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있다. 그 작은 글은 우리 가슴 속 알알이 깊이 박혀 있다. 그 많은 이야기들 중에 기억되는 일은 특별났기 때문이리라.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 현재에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과거의 사랑이기에. 그렇기 때문에, 그리하였기에, 그는 그랬구나, 그래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겠다로 위로받고 삭였다. 그러나 어찌됐든 그 당시에 그와 나에게서 사랑이 최우선이라면 지금과는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서로가 반하는 순간과 사랑의 유통기한도 생각났다.

- 사랑하기에 붙잡을 수 없고, 보낼 수 없기에 차라리 놓아버리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14쪽) : 그 당시에는 이조차 모르고 놓았다. 지금 돌아보니 이런 마음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아서 그랬을 거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그래. 그리고 같이 자려고 안달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하거든. 그럴 수 있다 해도 말이야.(58쪽) : 살다보니 이런 남자가 있었으면 바란다. 그러나 같이 자려고 안달하지 않는 사람이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 줄까. 꼭 남자여야 할까. 사랑 이야기는 성별이 다른 사람이 들어주면 더 위로가 될 듯해서, 그게 이유다.

-나 자신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듯,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내가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욕망의 심연이 있다는 것을.(112쪽) : 사랑한다면 폭풍의 언덕의 히드클리프처럼을 한때 생각했다. 오직 나만 바라봐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부분까지 그가 이해해 주길 바랐던 그 때는 사랑하는 게 서로를 아프게 하는 방법만 찾는 꼴이었다. 어리석었다.

-진실은 분석이 아니라 진심 어린 믿음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사랑은 흠 없는 완벽이 아니라 흠조차 기꺼이 끌어안는 너른 마음으로 완성된다는 것을.(194쪽) :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너른 마음으로 끌어안아 주기만 했어도 되었을 것을. 그냥 믿어 주면 되었을 것을. 어쩌면 나도 너가 사랑의 크기를 묻기보다 따스한 눈빛으로 안아주기를 바랐을 수도.

-배신은 아프다. 실연도 아프다. 증오도 아프다. 하지만 망각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선 끔찍한 고통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웃고 울던 그 모든 기억을 살뜰히 지워버린다는 것. 그것은 단지 사랑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고, ‘우리’라는 관계가 만들어왔던 모든 인연의 네트워크를 삭제하는 천형이다.(259쪽) : 잊으면 안돼. 잊지 않으면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그때의 변명도 어설픔도 아픔도 슬픔도 같이 나눌 수 있으니까. 사랑했다면 잊을 수 없을 거다. 그래서 관계에서 누군가에게 잊혀 진다는 게 가장 끔찍한 일이다. 만약 서로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는데, 누군가 불행한 상태라면 그리고 현재에서 만났다면 어떻게 될까. 아님, 행복한 상태라면 어떨까. 기억의 수준이 달라질까. 모를 일이다. 행복보다는 불행한 상황이 그 기억들을 더 생생히 떠오르게 할 거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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