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질문하는 동물이다. 신과 자연과 인간이 안긴 불행 앞에서, 인간은 묻고 또 물어왔다. 끝없는 물음은 얼핏 헛되어 보이지만 이보다 변화무쌍하고 강력한 무기는 없다. 인간에겐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악착같이 질문할 자유가 있다. (9쪽)
우리는 왜 망자들을 그리워할 뿐만 아니라 그 삶을 되새기고, 나아가 의미 있는 장소에서 소설적인 대화라도 나누려 노력할까. 존 버거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죽은 이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이제 정치적인 행위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그저 전통적이고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행위였죠. 그러던 것이, 이윤을 내지 못하는 것이면 전부 `퇴물` 취급을 하는 세계 경제 질서에 저항하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 너무나 다른 역사 속의 망자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면,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가냘픈 희망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액이든 즙이든 정치인들의 눈에서 흐르는 물에 주목할 필요가 없다. 책임을 통감한다는 그들에게 확인할 질문을 챙기기에는 빠듯하다. 언제 느꺼움이 찾아들었느냐고. 죽은이들의 속삭임을 어디서 들었느냐고. 어떤 잘못을 지적하고 무엇을 산 자들에게 당부하였느냐고. (35쪽)
필사의 핵심은 공감과 자발성이다. 소설이 좋아 밤새 옮겨 적는 노력을 아끼지 않은 필사본 소설의 독자처럼, 대자보 작성자들도 최초의 문제의식에 동의하여 시간과 돈을 자진해서 쓰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자보는 인터넷 공간의 글쓰기와는 다른 경험을 젊은 세대에게 새롭게 선사한다. 화면을 띄우고 자판을 쳐서 정해진 칸을 메우는 거소가 전지를 펼쳐두고 펜을 힘껏 쥔 뒤 쓰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내가 쓴 대자보를 붙이고 타인의 대자보를 읽기 위해선 대자보가 붙은 벽까지 걸어가야 한다. 그곳의 기온과 바람과 빛과 소리와 냄새 그리고 곁에 나란히 선 모르는 이들까지 대자보를 읽는 과정에 포함된다. 새로운 감각적 실존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82-83쪽)
글른 왜 쓰는가. 흔들리기 위해서다. 흔들리지 않는 이는 지금 거둔 수확이 전부라고 자만하지만, 1밀리미터라도 영혼이 흔들리는 이는 파릇파릇한 잎들 모두 떨어뜨리고 헐벗은 몸으로 추운 겨울을 기다릴 줄 안다. 그리고 이 겨울을 이기면 찬란한 봄과 더운 여름이 오리라는 것을 지나간 시절을 돌아보며 짐작한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글쓴이의 영혼이 먼저 흔들려야 하고, 또 이를 통해 읽는 이의 영혼을 흔들어야 한다. 글을 쓴다고 행복을 약속하긴 어렵지만, 삶의 우여곡절을 스스로 감내할 힘과 용기를 준다. (119쪽)
심수봉의 절창 [비나리]에 "우리 사랑 연습도 없이 벌써 무대롤 올려졌네"란 구절이 나오지만, 사랑만 연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죽음도 마찬가지다. 이 되돌릴 수 없는, 갑작스러운 단절은, 아득하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요절한 시인 기형도의 시집을 해설하는 자리에서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 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 그의 사진을 보거나,그의 초상을 보고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때, 무서워라, 그때는 그는 정말로 없음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적었다. (154쪽)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여행은 멋진 것이라고 괴테는 말했다. 그러나 살아서 돌아온 여행자만이 여행기를 남기는 법이다. 고향엔 왜 돌아가는가, 너무 멀리까지 가서 행여 돌아오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을 가리기 위함이다. 고향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큰 소리치는 사람에게조차 고향은 텅 빈 중심이다. (166쪽)
문제는 자세다. 나와 전혀 다른 배경과 인생관을 지닌 이를 물리치지 않고 보듬는 자세, 낯선 문명을 배우고 익히는 자세, 참혹한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해답을 차장 물고 늘어지는 자세, 스토리 디자이너의 자세가 바르면 그와 협력하는 모든 이의 자세가 바르고 이야기도 멋지고 힘차다.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화려한 테크닉도 한낱 손재주에 머무른다. (170쪽)
매혹이란 무엇인가. 프랑스 비평가 모리스 블랑쇼는 지적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라고, 어찌 글쓰기쁜이랴. 자신이 택한 일에 몰두하여 시간의 흐름조차 잊는 것. 저물 무렵 일을 시작하여 길어야 30분쯤 지났으리라 여겼는데 밝아오는 동쪽 창문에 깜짝 놀라는 것, 그것이 바로 매혹이다. (184쪽)
불안과 매혹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불안도 사라지고 매혹도 없는 일상이 백배는 더 위험하다. 미래의 안락을 정해두고 현재를 단지 그곳으로 가는 수단쯤으로 파악하는 삶이 천배는 더 끔찍하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으니, 언제나 첫 마음으로 돌아가서 매혹에 떨고 불안에 잠길 일이다. (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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