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가 왔다. 그 덕에 집에 머물러 책읽고 나의 첫문장을 찾다가 묵은 일기장 정리를 했다.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삐뚤 삐뚤한 글씨체가 낯익다. '당신의 첫문장'처럼 나에게도 한때 감명깊은 글들이 있었고, 이렇게 적어놓기까지 했구나...
경인년 1월 2일에는 정이연 '풍선'에 나오는 문장이 가지런히 적혀 있다.
"땅위의 모든 연애가 그러하듯, 그것은 우아하거나 고상하기 보다는 주로 사소하고 구질구질한 세목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구두에 대한 취향! 자신의 취향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구두를 신고 나타난 애인을 보면서 남자는 '이렇게 이 여자는 이런 구두와 나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을까?'라고 중얼거린다. 특별해 보이던 이 사람이 최초의 위기를 맞는 순간이다. 이상한 구두를 골랐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그녀가 그녀 나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불안에 빠진다. 그 구두를 묵인할 것인가, 아니면 기어이 포기 시킬 것인가, 사랑과 자유주의 사이의 유서깊은 갈등은 이렇듯 일상적이고 가장 개인적인 공간에서조차 거듭 모방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옮기다 보니 알랭드보통의 글에 나오는 구두이야기와 겹친다. 페이지도 없고 달랑 적어 놓고, 옆의 메모에는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정체성(정체성은 곧 개념(concept)이다. 내가 생각한 것을 법칙, 규칙으로 부여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개인의 사랑과 자유가 가능하다. 각자의 규칙의 통일성으로 사회가 유지되고 생존이 가능하다. 타인에 대한 개념을 정의하므로 특별한 존재로 가능하고 형성한 개념에 따라 세계가 파악되고 살아가게 된다. 등등..."
경인년 1월 7일에는 권정란 '지식의 충돌'이다.
"살다보면 한때 부풀어 오르던 삶의 솜사탕들이 다 녹아 없어지는 때가 있다. 사랑에 실패했거나 마음먹은 일이 뜻대로 안 되었을 때, 갑작스런 실직으로 출근할 데가 없어졌을 때, 그밖에는 생의 이런저런 사연들로 삶이 세상의 기준선에서 탈락되었을 때가 바로 그런 때이다. 세상의 모든 등록기들에서 이름이 빠져 있어 아무도 출석을 불러주지 않는 느낌이랄까, 이럴 때 삶에 대한 턱없는 기대는 하릴없이 잦아들고 내게 주어진 삶의 함량은 보잘것없는 부피로 짜부러든다. 세상은 살갗에 쓸리는 메마른 삼베처럼 씀벅이고, 생은 물기가 빠져 마른기침을 쿨럭인다. 그럴때면 나는 종종, 환생을 꿈꾸며 생의 후미진 동굴로 물러나 앉아 쑥과 마늘을 씹듯이 타인들의 생을 음미한다. 내게 이 음미란 물론 자서전이나 평전을 읽는 일이다. 실물적인 삶의 흔적으로 가득한 이 책들은 우선 쫄아든 내 삶에 생의 두터운 부피를 한아름 안겨주는 듯해서 읽는 맛이 난다. 반성이나 성찰만큼이나 삶의 몸집을 불리는 일이 중요할 때도 있다고 나는 보는데, 타인의 생을 숙주삼아 물기 빠진 삶을 다시 부풀리거나 단단한 사실들로 삶을 재무장하는 데 그것은 더없이 좋은 읽을거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거기엔 생의 이런저런 고난들을 겪으면서도 자기 삶을 거의 임계점까지 밀어붙이며 나아간 사람들의 궤적이 굵은 실선으로 나 있어 종착없는 내 삶의 방향성에 생생한 부피를 동반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책들에 대한 독서는 근자에 들어 내게 매우 요긴한 책읽기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 점에서 자서전과 평전 일기는 따라서 내 나름의 정신적 섭생인 셈이다." 메모는 책읽기에 무슨 이유가 있으랴. 책은 그야말로 마음의 양식이다. 요즘 책읽기 중 고전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다.
어떤 날에는 '이반일리치'라는 사람이 끌린다면서 누굴까?... "'더 낳은'이라는 개념이 '좋은' 개념으로 근본적인 규범으로 대체해버린다. 더 나은 것을 향한 경주에 같힌 사회에서 변화에 한계를 두는 것은 위협으로 느껴진다. 무슨 비용을 들여서라도 더 나은 것을 생산하고 소유하고야 말겠다는 식의 태도는 어떤 비용을 퍼부어도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욕구를 만들어 낸다."
누군가에게 닿아 있는 문장들이 살아서 숨쉬고 있다고 본다. 그 공기로 인해 여전히 사회는 굴러간다고 추상적이지만 믿어본다. 당신의 첫문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