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서재 속 고전 - 나를 견디게 해준 책들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나무연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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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 무리가 등장했다. 단지 사고를 정지하고 있는 차원이 아니라,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어디로 가곳 싶은지 등의 더 근원적인 욕망까지도 지배당하는 데 길들여진 사람들 무리다. (8쪽)

이처럼 인간의 자율성은 심하게 파괴됐다. 인간이 단편화된 것이다. 인간의 단편화는 상대를 그 속성으로만 단정하고(차별), 국가에 무비판적으로 동일화돼 타자를 일률적으로 적대시(전쟁)하는 데에 기여한다. (9쪽)

사람들은 희생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과거에서 배우지 않는다. 무서운 속도로 모든 것이 천박해지고 있다. 루쉰 따위는 읽지 않으며, 설령 읽는다 해도 그 부름의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51쪽)

내가 일상에서 접하는 일본의 젊은이 한 사람 한 사람은 선량하고 가련하지만 이런 사회, 정치 현상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어릴 때부터 관심 회로를 차단당한 채 성장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도 희생자이지만, 만일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또다시 그들이 타자를 해치게 된다. 그런 일이 가까운 장래에 현실화할지 모르는데도 본인들은 그 위기를 느끼지 못한다. 두려움도 탄식도 분노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평화`를 지킬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이리라. (53쪽)

죽어가는 본인이 죽음의 주도권을 박탈당하고, 죽음을 둘러싼 `격정`은 병원에서도 사회에서도 피해야만 하는 게 돼버린 것이다. 이런 `죽음의 금기시`는 20세기 초 무렵 미국에서 시작됐는데, 그것은 `슬픔이나 탄식의 모든 원인을 피하고, 비탄의 밑바닥에서도 늘 행복한 듯한 모양새를 해서 집단의 행복에 공헌한다는 윤리적 의미와 사회적 강제`에 그 원인이 있다고 아리에스는 말한다. (129쪽)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인식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치 문제다. 폭격으로 매일 아이들이 죽어가는 건 용인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논의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141쪽)

"기독교도들이 그 야만인(인디오)들을 복종시켜 지배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자연법에 따르면, 이성이 결여된 사람들은 그들보다도 인간적이고 사리 분별력을 갖춘 뛰어난 사람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인간 중에는 그 자연본성에 의해 주인인 자와 노예인 자가 있다. 저 야만인들은 죽음의 위험에 처할지라도 정복당함으로써 매우 큰 진보를 이룰 수 있다." `인간적``이성``사리 분별``진보`라는 말들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다니, 비위가 상할 정도로 전형적인 식민주의 레토릭(수사)이다. 하지만 식민주의의 포악성은 그 뒤 500년간이나 이어졌고 지금도 우리는 이런 레토릭의 변주곡을 계속 듣고 있다. (183-184쪽)

고전이란 어떤 시대에든 작품이 지닌 여러 겹이 만드는 두꺼운 두께 중 하나의 겹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어요. 만약 고전이 우리 시대에 어떤 울림도 주지 못하고 있다면, 그 많은 겹 중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끄집어내지 못한 걸 수 있고요. 즉 고전을 읽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해봐야겠지요. (223쪽)

학계에서는 `나`를 소거하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 환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듯합니다. 일본도 그렇고, 영어권 나라에서는 특히 심하고요. 주어가 없이 `A는 B다`라는 명제가 있을 때, 생략된 주어는 절대정신일지 신일지 모르지만 그 어떤 소양적인 인격일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명제에 의문을 제기하려면 내가 어디에 서 있고 어떤 각도와 시점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언급해야만 합니다. 명제에 생략된 주어,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존재와 위치를 되묻고 따지는 작업이 필요하지요. (225-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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