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으로 출발한다. 하지만 나중이 되면 과연 그런지 의심이 들며 혼란스러워진다. 나역시 그랬다. (22쪽)
거짓된 행복만큼 씁쓸한 게 또 있을까? 마음의 교류, 완벽하게 통하던 생각, 우정, 동지애...... 모두 미혹에 불과했다. 남자와 여자라는 종 사이에 오가는 끌림 같은 미혹, 자연의 유혹, 자연의 마지막이자 가장 교활한 기만, 나와 제니퍼 사이에는 오직 육체적인 끌림밖에 없었다. 거기서 괴물 같은 자기기만의 뼈대가 자라났다. 그것은 그저 욕정, 욕망이었다. 그 깨달음은 내게 굴욕을 안겼고, 나를 괴팍하게 만들어서 나 자신은 물론 그녀까지 거의 증오하기ㅣ에 이르렀다. 우리는 참담한 기분으로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우리가 그토록 확신했던 사랑의 기적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의아해하면서 (39쪽)
동물은 생각하지 않는다. 긴급하게 대처해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느긋하고 수동적이다. 생각한다는 것은(이 단어의 추론적 의미로 볼 때) 사실 인간이 어느 정도 고생해서 터득한 상당히 인위적인 과정이다. 우리는 어제 했던 일을 걱정하고, 오늘 할 일과 내일 일어날 일을 검토한다. 하지만 어제, 오늘, 내일은 우리의 사고와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일어났고 일어날 것이다. (52쪽)
"사람들이 정말 바보 같단 뜻이네. 수영을 제대로 하고 체계적인 인명구조 방법으로 아이를 구한 것보다 수영도 못 하면서 뛰어든 내가 훨씬 더 큰 찬사를 받는다는 사실이 말이지. 많은 사람이 아주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고 말할 걸세.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독한 바보짓에 불과하다고 할 거고. 사실 그건 바보짓이지. 실제로 잘한 사람은 내 뒤에 뛰어들어서 우리 둘을 구한 남자니까. 하지만 그는 내가 받은 찬사의 받도 받지 못할 거야. 그는 일급 수영 선수니까. 안타깝게도 그는 고급 양복을 버렸고, 아이뿐만 아니라 허우적대는 나까지 그에게 큰 짐이 됐지. 하지만 누구도 상황을 그렇게 보지 않을 거네. 당신 형수 같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런 사람은 많지 않아." 게이브리얼이 덧붙였다. "그런 사람이 많지 않은 게 오히려 고맙지. 선거에서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머리를 쓰는 사람이 많으면 아주 곤란하니까." (90쪽)
나는 불편하게 몸을 뒤척였다. 아니, 뒤척이려고 애쎴다. 그러자 불구의 몸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다른 종류의 예민한 아픔이 밀려왔다. 기억이라는 아픔. 나는 다시 콘윌발 런던행 기차에 타고 있었고 눈물방울이 수프 그릇으로 뚝뚝 떨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일은 그렇게 시작됐다.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동정으로 인한 무력감은 인생의 공격에 자신을 내동댕이치고 끌려가게 한다. 어디로? 내 경우에는 미래가 없고 나를 조롱하는 과거밖에 없는 휠체어였다......(128쪽)
하지만 노리스, 문제는 내가 평민의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았다는 거네. 난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전 커서 귀족이 되고 싶어요. 존 게이브리얼 경이 되고 싶어요`라고 했네. 아버지는 그러셨지. `그건 무리다, 존. 귀족은 타고나야 하는 거거든. 네가 대단한 부자가 된다면 그들이 너와 친구가 돼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건 같지가 않지.` 그래. 그건 같지가 않았네. 뭔가, 내가 절대 가질 수 없는 뭔가가 있었어. 작위를 말하는 게 아니야. 자기 확신을 갖고 태어나는 것. 자기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지 아는 것. 무례하고 싶을 때만 무례한 것 - 단지 덥거나 불편하다는 이유로, 또는 자기가 누구 못지않게 잘났다는 걸 과시하고 싶어서 무례한 것이 아니라 -,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전긍긍하지 않고 내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만 신경쓰면 되는 것을 말하는 거지. 내가 이상하거나 초라하거나 별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도 나는 나이기에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137쪽)
"그게 핵심이지 않을까? 한 인간이 상대에 따라 이렇게도 보이고 저렇게도 보인다는 게? 사물도 마찬가지지. 나무나 바다도 그렇고. 두 화가가 세인트 루 항구를 그리더라도 둘은 완전히 다른 개념을 내놓을걸." ........ "두 사람은 실제로 완전히 다른 눈으로 대상을 보는 거야. 모르긴 해도 인간이란 모든 것 중에서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만을 취사선택하는 존재야." (154쪽)
"누구에게나 빠져나갈 기회가 한 번은 있어요...... 나중까지는...... 나중에 돌아보기 전까지는 그게 기회였다는 걸 깨닫지 못하기 일쑤지만요...... 하지만 분명 그런 기회가 있는 법이에요......" (158-159쪽)
나는 백 가지 사랑의 기술을 알았으나 그 하나하나가 연인을 슬프게 만들었다.(에밀리 브론테 경구)
그녀는 반발했다. "끔찍해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상대에게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지우는 겁니다." 내가 말했다. (170쪽)
이런, 노리스! 물질적인 시샘, 성공과 재산과 부에 대한 시샘은 정신적인 질투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네! 정신적인 질투야말로 황산 같은 거지. 먹으면 바로 사람을 말살하는 독. 가장 숭고한 것을 보고 자기 의지와는 반대로 그것을 사랑하라고? 그러니까 그걸 증오하고 파괴해버리기 전까지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거야. 갈가리 찟고 짓밟아 숨통을 끊어놓기 전까지는.......(240쪽)
"그분을 위한 일이라면 뭐든 할 거예요. 정말 그럴 거예요." "그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그 마음만으로 충분해요. 그냥 내버려둬요." `사랑한다면 내버려두라`라는 말을 누가 했을까? 심리학자가 어머니들에게 한 충고였을까? 그 말에는 자식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큰 지혜가 담겨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누구를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노력하면 적에게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265쪽)
"말해봐요, 이사벨라. 당신은 결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죠? 당신에게 결혼은 어떤 의미예요? 법적 의미를 제외하고요." 이사벨라는 아주 골똘히 생각했다. "결혼이란 누군가의 삶의 일부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속으로 들어가...... 그 일부가 되고...... 그곳이 자신의 적절한 자리가 되는 거요." (30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