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니, 평화롭다는 말은 과장일 것이다. 가족의 생활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휴가, 전염병, 한겨울의 파이프 동파, 사실 삶은 소소한 드라마의 연속이었다. (12쪽)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 (24쪽)

싫다. 이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방금까지 지친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플랫폼을 기운차게 걸어가던 로드니. 버거웠던 짐을 내려 놓은 듯 경쾌하게 걸어가던...... 그녀에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있지도 않았던 일을 상상하고 지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장난을 쳤을 뿐일텐데. 로드니는 왜 기차가 역을 떠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을까? 그는 왜 그래야 했을까? (76쪽)

"이제 특별히 한마디만 더 하겠다. 나태한 사고는 금물이야. 조앤!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그게 가장 쉬운 길이라고 해도, 또 그게 고통을 면하는 길이라 해도 그래선 안 돼! 인생은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거란다. 그리고 자기만족에 빠지면 안 돼!" (115쪽)

레슬리는 자기 아이들이 연약하지도 이상주의적이지도 않다고 대답했다. 오히려 집안에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레슬리는 예전처럼 투박하고 엉성하게 손을 저으며 말햇다. "숨기는 게 훨씬 더 안 좋아요. 아이들이 아빠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을 때 전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아빠는 은행에서 돈을 훔쳐서 감옥에 가 있다고 말했죠. 이제 아이들은 도둑질이 뭔지 알아요. 전에 피터가 잼을 훔쳤을 때 벌로 침대에 가 있으라고 했거든요. 어른들도 잘못하면 감옥에 가야 한다. 아주 간단한 얘기죠." "아무리 그래도 아이가 아빠를 존경하지 않고 무시한다면......" " 아뇨. 아이들은 그이를 무시하지 않아요." 레슬리는 이번에도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덧붙였다. "사실 아이들은 아빠를 안쓰러워해요. 교도소 생활에 대해 죄다 듣고 싶어하고요." "난 그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조앤은 단호하게 말했다. (123쪽)

물론 에이버릴은 엄마를 많이 사랑했다. 아이들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다...... 그랬을까? 아이들이 그녀를 많이 사랑했을까? 그들이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했을까? 조앤은 의자에서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어디서 이런 생각들이 나왔을까? 무엇이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까? 두렵고 불쾌한 생각들. 마음속에서 밀어내버려.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봐...... (142쪽)

"아니다. 나는 그 가여운 사내에 대해 생각하는 중이야......" 갑자기 로드니의 목소리에 격렬한 감정이 담겼다. "내 말을 믿어, 에이버릴. 인간은 하고 싶은 일-타고난 일-을 하지 못하면 반쪽짜리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분명히 말하마. 네가 루퍼트 카길을 돌려세워 그 일을 계속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사랑하는 남자가 불행하고 성취감도 없이 사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날이 올 거다. 그는 나이보다 늙고 지치고 낙담한 모습으로 인생을 대충 살아가게 될 거다. 그럴 때 네 사랑이, 아니면 또다른 여인의 사랑이 그에게 보상이 될 거라고 믿는다면, 분명히 말하지만 넌 감상에 빠진 바보 멍청이야." (155-156쪽)

가끔 난 엄마가 그 누구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토니가 그렇게 말했다. 토니의 말이 맞았다. 조앤은 자식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로드니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을 사랑했지만 알지는 못했다.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사람들을 사랑하면 그들에 대해 알아야 하는 건데. 참된 진실보다는 유쾌하고 편안한 것들을 사실이라고 믿는 편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에, 그래야 자신이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몰랐다. (201-202쪽)

하지만 레슬리 셔스턴은 아름답지도 젊지도 않고 되는 일도 없는 여자였다. 지친 얼굴, 우스꽝스럽게 한쪽이 일그러지는 미소를 짓던 레슬리 셔스턴. 로드니가 그런 여자를 사랑했다고 -정말 열렬하게 사랑해서 1미터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도차 없었다고- 인정하는 것이 싫었다. 애절한 갈망, 이루지 못해 가슴 아픈 욕망. 그 강렬한 열망을 조앤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날 애셀다운에서 둘 사이에는 그런 감정이 오갔고, 조앤은 그것을 느꼈다. 그랬기 때문에 성급히, 그렇게 겸연쩍게 도망치듯 물러났던 것이다. 그녀는 알면서 단 한순간도 인정하지 않았다...... 로드니와 레슬리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왜냐하면 감히 바라볼 수가 없었으니까. (214쪽)

로드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나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전혀 없나요? 조앤은 속으로 외쳤다.
내가 그대에게서 떠나 있던 때는 봄이었노라.
그랬다. 조앤은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 봄 이후...... 우리가 처음 만나 사랑한 봄 이후..... 나는 쭉 내가 있던 자리에 있었어 -블란치가 옳았어- 나는 세인트 앤을 떠났을 때 모습 그대로야. 쉬운 삶, 나태한 사고방식, 자기만족, 고통도 감당할 수 있는 것만 골라서 두려워했지..... 용기가 없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그러고서 다시 생각했다. 로드니에게 가자. 미한하다고 말하면 된다. 용서해달라고...... 그래, 그렇게 말하면 된다...... 용서해줘요. 난 몰랐어요. 난 몰랐을 뿐이에요...... (219쪽)

에이버릴의 결혼실 날 그는 부녀 사이에 생긴 깊은 감정의 골을 의식하며 가장 사랑하는 자식에세 말했다.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행복하려고 노력할 거예요." 에이버릴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게 에이버릴이었다. 과장이 없었다. 과거에 머무르지 않았다. 자기연민에 빠지지도 않았다. 인생을 받아들이는 훈련이 되어 있었고, 타인의 도움 없이 삶을 살아낼 능력이 있었다. 이제 아이들은 내 손을 떠났어. 세 아이 모두. 로드니는 생각했다. (251쪽)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어야 했어. 한 번쯤은 말할 수도 있었는데......로드니는 생각햇다. (255쪽)

귀한 게 뭘까? 귀하지 않은 게 뭘까? 추억이란 것이 세상에 있기나 할까? "저는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레슬리. 부침 심한 전과자에 주정뱅이었던 남편, 가난, 병, 죽음.
불쌍한 레슬리 셔스텐. 그녀는 서글픈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로드니는 레슬리의 인생이 서글프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환멸과 가난과 병을 헤치고 나아갔다. 가려는 곳이 어디든. 그곳을 향해 쾌활하게 성큼성큼 늪지를 걷고 비탈밭을 지나고 강을 건너며 사이니처럼 나아갔다. 로드니는 지쳤지만 친절한 눈빛으로 아내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밝고 유능하고 분주한, 자신에게 만족하는, 성공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 여자는 스물여덟 살로부터 하루도 늙지 않은 것 같군. 그는 생각했다. 갑자기 몹시 애처로운 마음이 밀려들었다. (26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