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하경아 옮김 / 큰나무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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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지적이지 못하며, 냉담할 뿐만 아니라 대부분 정직하지도 않다. 혹시라도 정직하다고 해도 그들은 내 아내처럼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처럼 어려운 문제를 맡기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소작농들의 운명을 무책임한 내 이웃에게 맡겨 두는 것은 범죄와 같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남겨진 유일한 선택은 상황의 절박성에 복종하며 소작농들이 내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길 권리를 주장하게 내버려 두는 일뿐이다. (18쪽)

나는 우울하고 슬픈 기분에 젖어 무거운 마음의 고통을 느끼며, 아내가 집에 없을 때면 그녀의 방을 서성이면서 우리 부부가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성격 때문에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가능한 한 빨리, 저절로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건 바로 이 스물일곱 살의 아름다운 여인이 빨리 나이를 먹어 늙어버리고, 내 머리가 회색이 되고 벗겨지게 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이다. (22쪽)

한때 그는 매우 활동적이고 수다스러울 정도로 유쾌하며 쉽게 사랑에 빠지곤 하는 남자였고, 분명한 자기 견해와 여자뿐 만 아니라 남자까지도 매료시키던 독특한 매력의 얼굴로도 유명했다. 이제 그는 늙고 뚱뚱한 늙은이가 되어 자신의 견해도 없고 매력도 읽은 채, 그날 그날을 살아가는 노인일 뿐이다. (27쪽)

아내는 내가 익히 잘 아는 증오가 담긴 눈길로 내 눈을 쏘아보았다. "어떤 사람들한테는, 타인의 배고픔과 인간적 고통이란 존재 자체가, 자신의 역겹고 비열한 성질을 발산해 기분을 풀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지요." (40쪽)

아내가 보여 준 감정의 폭발은 우리가 함깨 한 결혼 생활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예전에는 싸움이 있은 직후마다 우리는 서로에게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끌리는 것을 느끼곤 했었다. 싸움 후에 우리는 영혼에 축적되어 온 모든 다이너마이트같은 폭발 요소들을 해소해 버렸다. 이제 이반 이바노비치가 나의 공간에서 떠나고 난 후, 아내에게 가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차를 마실 때 보인 그녀의 행동은 나에겐 모욕이었다는 것, 그녀는 잔인하고 속 좁게 굴었다는 것, 그녀의 비속한 정신을 결코 나와 같은 고상한 언행 수준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는 등의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나는 그녀에게 해야 할 말과 그녀가 무슨 말로 답할 것인가를 상상하면서 오랜 시간 방안을 왔다갔다하면서 걸어다녔다. (49쪽)

"어째서 나는 지난 몇 년 간 그토록 긴 싸움을 하면서도 아내와 이혼을 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 그녀는 왜 그때 나를 완전히 떠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지금처럼 그녀에 대한 갈망으로 이렇듯 괴로워하지도, 이런 증오심과 근심도 없었을 것을. 그랬더라면 인생을 조용히 살면서 일만 할 뿐 무엇에라도 걱정을 하지 않았을 텐데." (58쪽)

"당신이 고민했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기아와 애정은 그것하곤 아무 상관이 없어요. 당신은 굶주리는 농민들이 자기가 없어도 잘 해나갈까 봐 걱정하고. 젬스트보와 가난한 소작농을 돕는 사람들이 당신의 지도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걱정하는 것뿐이에요." (75쪽)

어떻게 해야 그녀가 내 진심을 믿게 될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에 갇혀 사는 이 야생 동물에게 자신이 내게는 소중한 존재이며 그녀가 괴로워하면 나 역시 괴롭다는 걸 납득시킬 수 있을까? 난 아내를 이해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말하는 법이나 알맞은 화젯거리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녀의 외모는 잘 알고 있으며 당연히 찬미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영적, 도덕적 세계, 그녀의 정신, 인생관, 잦은 기분의 변화, 증오로 가득 찬 그녀의 두 눈, 경멸, 때로는 나를 놀라게 하는 그녀의 독서 범위와 다양성, 이 모든 것이 내게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녀와 충돌할 때마다 나는 그녀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정의하려고 노력했으며, 나의 심리학 진단 결과는 그녀가 경솔하고 허황되며, 성질이 나쁘고 여자의 논리로만 세상을 본다고 판단을 내리곤 했다. (91-92쪽)

"당신은 훌륭한 교육을 받고 좋은 가문에서 자란, 정직하고 공정하며 높은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지요.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당신이 가는 곳마다 숨막힐 듯한 분위기와 억압, 게다가 상대에게 모욕적이고 굴욕적인 기분이 들게 만들어요. 당신은 만사를 직선적으로 보기 때문에 세상 전체를 싫어하죠.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신앙이 무지와 문화 결핍의 표현이라고 싫어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양심이 없는 사람으로 이상도 없다는 이유로 역시 싫어해요. 늙은 사람은 보수적이고 시대에 뒤진다는 이유로 싫어하고, 젊은 사람은 자유분방한 사고 때문에 싫어해요. 소작농과 러시아의 관심사는 당신에게 소중하지만, 소작농 한 사람 한 사람이 도둑이고 강도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 때문에 당신은 소작농도 싫어해요. 당신은 모든 사람을 싫어해요. 당신만 늘 정당하고 언제나 자신의 법적 권리 위에 자리를 확보하고 소작농과 이웃들을 다룰 때는 항상 법을 끼고 살아요......" (95쪽)

"자네 부인은 운이 좋아."
이반 이바노비치는 한숨을 쉬었다.
"특별히 하는 일이 없어도 그녀는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됐거든. 사업 전체가 대부분 그녀의 손에 달려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주변으로 모여들어. 의사, 지방 관리, 여러 부인들이 그렇지. 무슨 일에 적격인 사람들만 있으면 일은 저절로 성사되지. 아무렴, 사과나무는 아무 생각이 없어도 나무에서 사과가 저절로 열리는 법이야."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을 내버려 두지 않는 건 사람들뿐입니다." 나는 말했다.
"에? 맞아." 이반 이바노비치는 말했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124-125쪽)

"제가 까다로운 성격을 가졌고 나와 사이 좋게 지내기가 어렵다고 해주신 말씀을 아직도 기억하세요? 성격을 고치려면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130쪽)

나는 아내에게 명랑하게 웃어준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모른다.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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