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그래피 매거진 4 이문열 - 이문열 편 - 시대와 불화하다, Biograghy Magazine
스리체어스 편집부 엮음 / 스리체어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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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문단의 주류 담론은 민족 문학, 민중 문학, 노동 문학이었다. 많은 작가들이 민중을 주체로 문학 운동의 성격이 강한 작품을 앞다투어 발표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이문열은 응답하지 않았다. 민중주의자들이 말하는 정의와 참여가 그에게는 다수의 억압과 횡포로 여겨졌다. 획일주의를 거부한 이문열은 무이념을 이념으로 삼았다. 그가 추구한 탐미주의, 예술 지상주의는 양자택일의 곤혹함을 벗어날 적당한 구실이 되기도 했다. (55쪽)

2001년 11월에 책 장례식이 열렸다.(60쪽)
세계 문화사에 유례가 없는 책 장례식에 문단은 침묵을 지켰다. 어느 누구도 나서서 저지하지 않았다. 소설가 박완서만이 책 장례식은 문학을 모독하는 일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61쪽)

"막말로, 엎어져도 왼쪽으로 엎어져야 하고 자빠져도 진보 흉내를 내며 자빠져야 한다는 소리와 다름이 없다. 어떻게 해서 특정한 이념이나 정치적 노선에 동조해 발언하는 것은 치열한 작가 의식이요 투철한 산문 정신이며, 거기 상반되는 이념이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온당치 못한 문학이고 무책임한 정치 개입이 되는가. 간청하노니, 문학평론가라기보다는 설익은 정치평론가 여러분, 아니 지각한 좌파 논객 제군, 제발 소설은 소설로 읽어 달라. 또 간청하노니 독자에게서 스스로 읽고 판단할 기회를 빼앗지 말라. 근거 없는 문학론으로 재단된 선입견을 심어 독자로부터 이 소설을 차단하려 들지 말라." (63쪽)

이문열은 그람시의 진지전 개념을 한국 사회에 대입했다. 70~80년대 권위주의 정권을 거치는 동안 좌파 진영이 견고한 문화 진지를 구축해 왔다는 것이다. 이문열은 "말 없는 다수는 사라지고 겁먹은 허수만 남은 줄 알았다. 그러나 들여다보니 허수가 아니라 함락된 진지였다"고 말한다. 그는 보수적 입장을 대변하는 "말하는 소수"를 자처했다. 민감한 발언을 하면 "잘했다. 그런데 당신 이제 큰일 났다"는 말을 들으며 함락된 진지를 지켜 왔다. 그는 역사 발전이 성취와 반성을 거듭하면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악당과 어리석은 사람들이 주도해 온 세상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선의로 노력해 이룬 세상이다. 과거를 부정해야 옳은 세상이 온다면야 미래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것이다." 외딴 참호에 홀로 남아 진지전을 벌이는 동안 그는 좌.우 이념 갈등의 상징이자 보수의 아이콘이 되었다. 소설가인 그가 무슨 말을 하면 문화면이 아닌 정치면에 실렸다. (71쪽)

2001년 이문열은 `책 장례식` 등의 고초를 겪으며 홈페이지를 폐쇄했다. 그에게 인터넷은 `집단 지성이 아닌 집단 최면`이다. 사유에 대한 배려가 없는 SNS는 `자해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는 인터넷 광장의 순기능은 인정하면서도 광장의 타락을 경계한다. 다수로 위장된 소수의 광기와 폭력이 현실을 왜곡하고 여론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75쪽)

어떤 사회적 변화가 진행된 다음에 다른 단계와 와야 하는데 우리는 한꺼번에 한 덩어리가 왔습니다. 프랑스나 영국 같은 서구의 중심 사회에서는 산업화가 오고, 시민 사회가 형서오디고, 민족 국가가 등장하고, 계급 혁명이 일어나고, 이렇게 순차적으로 진해오디는데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가 함께 와서 대판 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택일이 되는 거예요. 야, 너는 산업화 선택할 거야, 민주화 선택할 거야? 산업화 선택하면 보수 꼴통이 되고, 민주화 선택하면 좋게 말해 의식 있는 사람이 되고 나쁘게 말해 진보 좌파가 되는 거죠. 동시성으로 벌어지는 택일 관계가 우리를 굉장히 혼동시키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나도 핵심적인 흐름에 끼어서 몇십 년간 고통스러운 시비에 걸려 있는데, 이런 것들도 이제 조심스러워집니다. 그전에 싸울 때는 반대쪽을 무시하고 내 얘기만 하면 됐는데, 이제 내 눈으로 보고 생각하고 판단했던 것들을 객관화시켜서 세상에 남겨야 하니까 깊이 이해해야 할 필요가 생겼어요. 내 나이도 이만한데 옛날처럼 한편만 들 수는 없지 않겠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가치에 기대어 다른 가체에 피해를 입힌 적은 없었나. (66쪽)

세계라는 건 공짜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고했어요. 왜 자기들 빼고는 전부 다 악당 아니면 바보로 생각하는지. 누구나 한 번뿐인 삶을 가지고 웬만하면 남한테 욕먹을 짓 안 하려고 압니다. 나는 그걸 믿습니다. 이 세계도 그래요. 나한테 세계를 만들 힘이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만들지. 왜 이상하게 만들어서 남 골탕 먹이겠어요? 나는 지금 만들어진 세계와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정말 피눈물을 흘러 가며 애써 살았던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내 보수란 그런 뜻입니다.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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