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철에 티파사에는 신(神)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 뿐이다. 엄청난 열기 속에서 향초(香草)들의 육감적인 냄새가 목을 긁고 숨을 컥컥 막는다. 풍경 깊숙이, 마을 주변의 언덕들에 뿌리를 내린 슈누아의 시커먼 덩치가 보일락 말락 하더니 이윽고 확고하고 육중한 속도로 털고 일어나서 바닷속으로 가서 웅크려 엎드린다. (13쪽)
사람은 그저 몇 가지 익숙한 생각들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법, 두 세 가지의 생각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떠돌며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면서 그 생각들을 반들반들해지도록 닦아 지니거나 변모시킨다. 이것이 바로 나의 생각이라고 제대로 내놓고 말할 수 있는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갖는 데는 10년이 걸린다. 이렇게 볼 때 사실 다소 절망적인 느낌이 들 만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의 아름다운 얼굴과 어떤 식으로 낯이 익어지게 된다. 지금까지 그는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보았었다. 그러니 이제는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서서 그 얼굴의 프로필을 바라보아야 한다. 젊은 사람은 세계를 정면에다 놓고 바라본다. 그는 비록 죽음이나 무(無)의 끔찍한 맛을 씹어본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죽음과 무에 대한 관념을 윤이 나도록 다듬을 시간이 없었다. 젊음이란 것은 바로 그런 것, 죽음과의 저 모진 정대면이요 태양을 사랑하는 동물 특유의 저 육체적인 공포, 바로 그것일는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적어도, 흔히들 하는 말과는 반대로 젊은이게게 환상 따위는 없다. 환상을 만들어낼 시간도 경건함도 없다. (28쪽)
우리가 어떤 도시와 주고받는 사랑은 흔히 은밀한 사랑이다. 파리, 프라하, 심지어 피렌체 같은 도시들은 웅크리고 돌아앉아 있어서 그것 특유의 세계에 테를 두르듯 한계를 짓는다. 그러나 알제는, 그리고 그와 더불어 바다에 면한 도시들처럼 몇몇 특혜받은 장소들은, 입처럼 혹은 상처처럼 하늘로 열려 있다. 우리가 알제에서 좋아할 수 있는 대상은 누구나 다 향유할 수 있는 것, 길 모퉁이를 돌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바다, 어떤 햇빛의 무게, 인종(人種)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 거리낌없이 주어진 풍성한 선물 속에는 더욱 은밀한 향기가 담겨 있다. (33쪽)
사람이 가슴으로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이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늘이 피렌체 들판의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들을 엄청나고 말없는 슬픔으로 뒤덮어가기 시작하는 어떤 저녁, 나는 이 진실이 자명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 고장의 슬픔은 아름다움에 대한 한갓 주석만은 결코 아니다. 저녁을 가르며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나는 내 속에서 무엇인가의 응어리가 풀려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슬픔의 얼굴을 가진 이것이 그래도 행복이라고 불리는 것임을 오늘 내가 어찌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56-57쪽)
유일한 세계란 다름 아닌 인간이 없는 자연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나를 무화(無化)한다. 그것은 나를 저 극한에까지 떠밀어간다. 세계는 분노하지 않은 채 나를 부정한다. (67쪽)
황혼은 날마다 이 세상 마지막 광선이 장엄한 임종을 알린다. 바다는 군청빛, 길은 엉킨 핏빛, 해변은 노란 빛이다. 모두가 초록빛 태양과 함께 사라진다. 한 시간 후에는 언덕에 달빛이 흘러 넘친다. 그러면 별들이 비오듯 하는 광막한 밤이다. 소낙비가 가끔 밤을 가로질러 가고, 번개가 모래언덕을 끼고 달리며 하늘을 창백케 하고 모래 위와 사람의 눈자위 속에 오렌지빛 미광을 뿌린다. 그러나 이것은 남과 나누어 가질 수가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것을 몸소 체험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만큼한 고독과 위대함은 그 장소에 잊지 못할 얼굴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102쪽)
신화는 그것 자체로는 생명이 없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에다가 피와 살을 부여해주기를 기다린다.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요청에 응하면 신화는 우리들에게 그 싱싱한 즙을 고스란히 제공해준다. 우리는 그 즙을 보존해야 하며, 소생이 가능하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잠이 치명적이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121쪽)
대낮의 아름다움은 이제 한갓 추억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그 진창투성이의 티파사에서는 추억 그 자체도 희미해졌다. 물론 아름다움, 충만감, 혹은 청춘이 관심사였는데도 말이다!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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