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부의 서재 - 어느 외주 교정자의 독서일기
임호부 지음 / 산과글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세계의 최고 판관`, 즉 신에 의해 권리를 부여받은 인민이 새롭게 창조한 나라, 군주의 지배를 받아본 적도 없고, 심지어는 독재자의 망령에 시달려본 적도 없는 그런 나라에서 인민이 타도해야 할 대상은 없다. `체계`, 즉 시스템을 문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파이의 분배 방식만이 문제일 뿐. "파이 따위는 이제 먹지 않아!"가 아니라 "그럼 내 몫의 파이는 얼마나 되는 거야?"가 문제인 것이다. (38쪽)

그레고르가 죽자 가족은 하숙생들을 내쫓고 하녀마저 나가게 한 뒤 놀랍게도 나란히 식탁에 앉아 각자의 직장 상사에게 하루 결근하겠다는 편지를 쓴다. 그러고는 오랜만에 가족 외출에 나선다. 희망찬 미래를 기약하며. 하지만 치욕은 오랫동안 그들을 괴롭힐 것이다. 가족을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죄책감을 씻어내기 위해 합의를 이용한데서 비롯된 치욕. 세상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중재자 같은 건 없다는 걸 그들은 그 치욕을 통해 깨닫게 될 것이다. 치욕이 유지되는 한 세상의 모든 합의는 무효다. (122쪽)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 또한 그들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의 삶과 연결된다. 우리가 우리 삶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의 삶과 연결된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우리 삶에 찾아온 손님들일 뿐이다. (200쪽)

철학인 깊이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철학이나 수학은 사유의 이치를 궁구하고 그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일진대, 이치와 질서라면 표면과 관계되는 것이지 깊이와는 무관하지 않은가. 각자 자기만의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앉아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게 철학이랄 수는 없을 테니까. 각자의 구덩이와 그 깊이의 차이를 인정하면 철학은 불가능해진다. 그 구덩이의 깊이를 표면의 연장으로 보고 표면 위의 점으로 일반화해야 철학은 비로소 가능해지니까. 따라서 철학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깊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거꾸로 우리의 그 잘난 깊이 때문은 아닐는지. 우리가 모르는 것은 우리의 깊이가 아니라 표면일지도 모르니까. (204-205쪽)

부사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의 삶이 징검다리를 건널 때처럼 허방과 마주할 때마다 부사는 마치 누군가가 던져준 징검돌처럼 우리의 바닥을 든든히 받쳐준다. 힘차게, 안전하게 혹은 짜릿하게. 그중에서도 삶의 허방을 채워주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삶 그 자체를 규정해줄 만큼 중요한 부사도 있다. 그 자체로 징검다리인 부사, 접속부사다.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런데도 불구하고). (247쪽)

내가 보았고 내가 겪었다. 나는 본 대로 겪은 대로 썼을 뿐이다. 이 말보다 완고한 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 말은 `나`에 대한 존재 선언인 동시에 다른 해석을 차단하고 더 이상 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배제 선언이기도 하니까. (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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