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비포 유 미 비포 유 (살림)
조조 모예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투석기로 발사된 돌덩이처럼 완전히 다른 삶 속에 처박히게 되면, 아니 적어도 얼굴이 유리창에 닿아 짜부라질 정도로 심하게 등 떠밀려 남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84쪽)

이제 와 알게 된 사실을 뇌리에서 떨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자기 죽음을 앞두고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 보낼 뿐이라는 걸 알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가 있을까? 어떻게 내 손가락으로 그 피부를, 따뜻하고 살아 있는 그 피부를 느꼈던 남자가 삶을 끝내겠다는 선택을 할 수가 있었을까? 어떻게, 모두의 암묵적인 동의 속에서, 겨우 6개월의 시간이 흐르면 그 피부가 땅 속에 묻혀 썩어가게 된다는 걸까? (159쪽)

똑바로 누워 윌을 생각했다. 그의 분노와 슬픔을 생각했다. 윌의 어머니가 했던 말을 곱씹어 생각했다. 내가 그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얘기. 눈발이 창밖에서 활금빛으로 날리던 그날 밤 몰라홍키 노래를 듣고 웃음을 참으려 애쓰던 그를 생각했다. 따스한 살갗과 부드러운 머리카락, 그 손, 살아 있는 사람, 내가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똑똑하고 재미있는 사람, 아직도 스스로 목숨을 끊기보다는 훨씬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람의 그 손을 생각했다. 그러다 결국 머리를 베개에 묻고 울었다. 내 인생이 갑자기 전에는 상상조차 못한 기경으로 어둡고 복잡해졌다는 느낌이 덮쳐왔다.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일 큰 걱정이 고작 첼시 번 빵 주문량이 충분할까에 그쳤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나는 울었다. (174-175쪽)

슬며시 윌을 바라보았다. 그는 문득 자기 자신을 잊은 듯 황홀경에 에워싸여 있었다.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갑자기 그를 보는 게 무서웠다. 그가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는 감정들이 두려워졌다. 심연처엄 깊은 상실, 그 두려움의 바닥이 겁이 났다. 지금까지 살아온 윌 트레이너의 삶은 내 체험을 까마득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내가 뭔데 그에게 삶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논할 수 있단 말인가? (234쪽)

나는 술을 한 잔 마시고, 또 마셨다. 기록이며 무릎이 까졌다는 등 수영시합이 벌어졌다는 등 그런 얘기들을 들었다. 그러다 관심을 끊고 펍의 다른 사람들을 구경하며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저들 모두 각자의 삶에서 크나큰 사건들을 겪고 있을 터였다. 사랑했다가 잃어버린 아기, 어두운 비밀, 기쁨과 비극들, 저 사람들이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면, 이렇게 볕 좋은 저녁을 그저 즐길 수 있다면, 분명 나 또한 그래야만 할 터였다. (328쪽)

나는 다시 미로에 눈길을 주었다. 그 어두컴컴하고, 빽빽한, 마치 궤짝같은 덤불 울타리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나는 수년에 걸쳐 웃기게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다 끝난 일인데. 그리고 이제 나는 다 잊고 내 삶을 살아가려 한다. (351-352쪽)

밤새도록 그렇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어도 좋았다. 특유의 눈가에 잔주름이 지는 웃음. 목이 어깨로 이어지는 그 지점. "뭔데요?" "가끔은 말이에요, 클라크. 이 세상에서 나로 하여금 아침에 눈을 뜨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건 오로지 당신밖에 없다는 거." "그러면 우리 어디론가 가요." (388쪽)

패트릭을 생각하고, 그의 아파트에서 내 소지품들을 챙기고 벽에 붙어 있던 내 달력을 떼어 돌돌 말고 그토록 조심스럽게 그의 서랍장에 정리해 넣었던 옷가지들을 개어 짐을 꾸리면서도,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쓰라린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쓸쓸하지도 않았고, 감당 못할 슬픔에 휩싸이지도 않았고, 몇 년씩 사귄 연애를 끝장낼 때 응당 느껴야 할 감정들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몹시 차분했고, 약각은 서글펐고, 어쩌면 조금은 죄책감을 느꼈다. 헤어진 데 내 책임이 크다는 생각도 들고 이토록 아무 감정이 없다는 것도 죄스러웠다. 나는 두 번인가 문자를 보내, 정말, 정말 미안하다고, 익스트림 바이크에서 좋은 성적 거두길 빈다고 했다. 그러나 답장은 없었다. (436쪽)

"여기서 자다 보면 그 친구가 자다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소리를 듣게 될 때가 있어요. 왜냐하면 꿈속에서는 여전히 걸어 다니고 스키를 타고 별별 걸 다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짧은 몇 분 동안, 그 친구의 심리적 방어막이 걷히고 진심이 다 드러나서, 말 그대로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견딜 수가 없단 말입니다. 거기 내가 같이 앉아 있어도, 어차피 아무것도 나아질 리 없으니까 해줄 말이 하나도 없어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패를 쥐고 사는 친구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거 압니까? 어젯밤에 그 친구를 보면서 그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생각했어요...... 그 친구가 행복하기를 세상 그 무엇보다 바라지만 나는...... 나는 도저히 그가 하려는 일을 감히 내 잣대로 판단할 수가 없어요. 그건 그 친구가 선택할 일이에요. 그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444쪽)

지금은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단순히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를 잃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토록 고집부리며 좋았던 것들, 좋을 수도 있는 것들을 보지 않으려 작정하고 끝까지 마음을 돌리지 않으려 한다는 생각을 하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날짜가 무슨 바위에 새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무조건 강행하려는 그가 믿어지지 않았다. 백만 가지 소리 없는 항변이 머릿속에서 덜컹거렸다. 어째서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은 거예요? 어째서 나로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어째서 나한테 속내를 털어놓이 않았던 거예요? 우리한테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그랫다면 달랐을까요? (479쪽)

너무나 가까이 붙어 있어서 말소리가 내 몸을 관통해 진동하는 것 같았다. "어이, 클라크." 그가 말했다. "뭐 좋은 얘기 좀 해줘요." 나는 맑고 파란 스위스의 하늘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두 사람, 처음엔 서로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두 사람, 하지만 결국은 온 세상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건 단 둘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던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나는 그에게 들려주었다. 그들이 함께 했던 모험들, 그들이 갔던 장소들, 그리고 내가 꿈도 꾸어보지 못했지만 결국 보게 되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짜릿하게 전류가 통하는 하늘과 형광빛으로 빛나는 바다와 웃음소리와 어리석은 농담들로 가득했던 밤들을 그에게 그려주었다. 그를 위한 세상을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었다. (522쪽)

이게 끝입니다. 당신은 내 심장에 깊이 새겨져 있어요, 클라크. 처음 걸어 들어온 그날부터 그랬어요. 그 웃기는 옷들과 거지 같은 농담들과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숨길 줄 모르는 그 한심한 무능력까지. 이 돈이 당신 인생을 아무리 바꾸어놓더라도, 내 인생은 당신으로 인해 훨씬 더 많이 바뀌었다는 걸 잊지 말아요. 내 생각은 너무 자주 하지 말아요. 당신이 감상에 빠져 질질 짜는 건 생각하기 싫어요. 그냥 잘 살아요. 그냥 살아요. 사랑을 담아서, 윌. (5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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