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예찬 -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예찬 시리즈
다비드 르브르통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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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때 경험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돌아온다. 기차나 자동차는 육체의 수동성과 세계를 멀리하는 길만 가르쳐 주지만, 그와 달리 걷가는 눈의 활동만을 부추기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목적없이 그냥 걷는다. 지나가는 시간을 음미하고 존개를 에돌아가서 길의 종착점에 더 확실하게 이르기 위하여 걷는다. 전에 알지 못했던 장소들과 얼굴들을 발견하고 몸을 통해서 무궁무진한 감각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기 위하여 걷는다. 아니 길이 거기에 있기에 걷는다. 걷기는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환희로 바꾸어놓는 고즈넉한 방법이다. (21쪽)

보행은 가없이 넓은 도서관이다. 매번 길 위에 놓인 평범한 사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서관,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장소들의 기억을 매개하는 도서관인 동시에 표지판, 폐허, 기념물 등이 베풀어주는 집단적 기억을 간직하는 도서관이다. 이렇게 볼 때 걷는 것은 여러 가지 풍경들과 말들 속을 통과하는 것이다. (91쪽)

걷기는 원초적인 것, 원소적인 것과의 접촉이다. 걷기는 대지와의 만남이다. 걷기가 대자연 속에서 사회적인 특징을 갖춘 어떤 차원(길, 오솔길, 여인숙, 방향표지판 등)을 동원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공간 속으로의 침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의 공간은 사회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지리, 천문기상, 환경, 물리, 음식 문화 등과 관련된 공간이다. 걷는다는 것은 그 공간을 벌거벗은 세계 혹은 우주에 종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108쪽)

이런 도보탐험은 면도날 위를 걸어가는 듯 지난한 것으로 매순간 사람들의 생명을 위험 속으로 몰아넣고 끝없는 인내와 예외적인 육체적 정신적 시련을 강요한다. 이 도보여행은 나귀나 낙타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물론 이때의 걷기는 걷기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탐험을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다. 이런 탐험에서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인내와 흔희 그런 탐험이 강요하는 고난을 끝장내버리고 싶은 욕구가 서로 대결하게 된다. 이때 오직 중요한 것은 더 나은 방법이 없기에 그저 몸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다. 걸음을 멈추는 것은 기분전환이 아니라 시간을 허비하고 가진 것을 낭비하고 사기를 저하시키는 장애로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여행의 목적이지 그 목적에 도달하는 수단이 아니다. (176쪽)

걷는다는 것은 더위와 추위를, 바람과 비를 만난다는 것이다. 도시는 하루의 시간대나 계절에 따라, 그리고 햇빛이나 소나기로 인하여 피로해지고 뜨거워지고 때로는 더욱 생기를 얻는 개인의 육체적 상태에 따라, 피부에 변화무쌍한 촉감을 느끼게 한다. (220쪽)

걷기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고 단순하게 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을 털어낸다. 걷기는 세계를 사물들의 충일함 속에서 생각하도록 힌도해주고 인간에게 그가 처한 조건의 비참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오늘날 걷는 사람은 개인적 영성의 순례자이며 그는 걷기를 통해서 경건함과 겸허함, 인내를 배운다. 길을 걷는 것은 장소의 정령에게, 자신의 주위에 펼쳐진 세계의 무한함에 바치는 끝없는 기도의 한 형식이다. (237쪽)

걷기는 시선을 그 본래의 조건에서 해방시켜 공간 속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 속으로 난 길을 찾아 가게 한다. 걷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모든 것과 다 손잡을 수 있는 마음으로 세상의 구불구불한 길을,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면의 길을 더듬어 간다. 외면의 지리학이 내면의 지리학과 하나가 되면서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을 평범한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시킨다. (251쪽)

개인주의 사회에서 우리를 세상에 내놓는 것, 우리를 인정받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몸이다. 전통적 공동체 사회에서 개인은 우리라는 개념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각자는 어떤 계통에의 소속을 통해서 자기를 확인했는데 우리들의 사회는 그와 반대되는 것이다. 세계가 우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파악하기 어려워 질 때 그 지주로서 남는 것은 몸이다. 몸은 알쏭달쏭하여 감이 잡히지 않는 삶 속에서 살을 다시 찾아 가질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다. 몸은 다듬는 것은 세계에 매달리는 하나의 방식으로 변했다. 몸은 무한히 재조정되는 어떤 아이덴티티의 부대사항으로 승격했다. 회관은 가장 밀도 짙은 깊이의 장소가 되었다. 폴 발레리가 말했듯이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 그래서 걷기예찬은 삶의 예찬이요 생명의 예찬인 동시에 깊은 인식의 예찬이다.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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