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시령의 바람을, 쇠심줄처럼 질긴 바람의 뼈대가 만져질 듯한 거친 그 바람을 좋아했다. 그곳에 서서 바람을 맞고 싶었다. 그런 바람 앞에 서 있으면 풀리지 않을것처럼 몇 달째 나를 괴롭히고 있던 일이 풀릴 것 같았다. (11쪽)
순자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그랬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추억은 순자라는 한 여자와의 추억이 아니었다. 그의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이 혹은 그가 잃어버린 열망과 꿈이 담긴 과거 전체였으며 그가 결코 되돌아 갈 수 없고 재현할 수 없는 인생의 어느 시기였다. 그가 아름다웠던 시절, 그가 선량했던 시절, 타락이 무언지 몰랐던 시절. (55쪽)
생각이 자꾸 어느 지점으로 가려고 할 때 완벽하게 무언가를 차단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양손을 감은 눈두덩 위헤 올리면, 정말 아주 조금 생각이 통제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1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