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생은 우리를 배반하는데 그건 주로 가슴이 나설 때의 일이다. 몇 백만 년 동안 그런 가슴이 골치 아팠던 머리는 그 사실을 쇼윈도에 전시하기를 꺼려 지하 창고에 처박아두려 했지만 가련한 그 시도가 승리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가끔 승리했다 해도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역습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71쪽)

"왜 사랑하나요?"라는 문장은 문법적으로는 옳다. "어떻게 그를 사랑하게 되었나요?"라는 질문도 문법적으로 옳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 말들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 사랑하는지 이유를 분명히 댈 수 있다면 이미 그건 사랑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주 먼 훗날 한 여자를 사랑했고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수도원을 떠났던 내 동료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A4 용지를 건내던 그녀의 손을 본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건 A4 용지 때문도 그녀의 손때문도 아니었으리라. 대답하자면 그건 그냥 사랑 때문이었으리라. (82쪽)

"힘들지요. 하느님, 이 늙은이를 빨리 데려가시지 않고 이렇게 내버려두어서 무얼 얻으시려는 건지 궁금하지요. 그러나 내가 물어도 늘 그렇듯 대답이 없으세요. 80년이 넘도록 물어도 대답 없는 양반이니 말이지요. 다만 내가 알게 된 게 있다면 내가 평화 가운데 있다는 거예요. 젊었을 때 나는 평화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제 겨우 하나 알게 되었어요. 평화는 고통 가운데서, 혼란 가운데서, 병과 늙음 그리고 죽음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붙들고 있는 거라는 걸." (108쪽)

나는 강변의 그 벤치로 걸어갔다. 강변의 그 벤치는 거기 그대로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베치는 더 이상 평범한 의자가 아니었다. 내가 걸어온 강둑길도 더 이상 그냥 길이 아니었다. 만년 전부터 흘렀으며 오늘도 흐르는 저 강물도 더 이상 그 강물이 아니었다. 그녀 한 사람이 내 인생으로 걸어 들어왔을 뿐인데 모든 자연이, 사물이 내게 말을 걸고 사연을 소곤거리고 가슴에 새겨진 추억들을 노래하면서 특별하게 빛났다. 이대로 그녀를 보내고 이 거리를 걸어갈 때마다 내게 소곤거릴 그 사물들이, 그 강물이, 그 가로수와 그 벤치의 노래들이 나는 두려웠다. 거리거리마다 그녀의 부재를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칠 것이었다. 수도원도 안전하지 않았다. 이제 성당조차도 그녀가 앉았던 그 자리 없이 생각할 수 없게 나는 변해버렸다. 한 사람으로 인해 온 우주가 기우뚱했고 그리고 다른 우주가 생겨나버렸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154쪽)

이상하다. 이 지상을 떠난 사람의 자취는 그가 남긴 사물에서가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발견된다. 죽어서 삶이 더 선명해지는 사람이 있다. 죽어서야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 살아 있었다면 그저 그렇게 내 곁을 스쳐 지나갔을 평범하고 시시한 한 사람의 생이 죽어서야 모든 이의 삶 속에 선명해지는 것. 아마 대표적인 이가 예수였겠지. 죽은 몸이 벌떡 일어나지 않아도 그것이 어쩌면 부활이 아닐까. (170쪽)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 그것을 아십니까? 그 끔찍한 누더기 같은 움막에 성 마오로니, 성 프라치도니, 성녀 젤트루드라는 이름이 붙자 그것은 신비하게 빛났습니다. 아아, 이름의 신비를 아십니까? 저는 왜 하느님이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손수 붙이라고 했는지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226쪽)

사랑은 소낙비처럼 그냥 오는 거란다. 등산 도중 산등성이에서 앉아서 쉴 때 난데없이 세차게 불어노는 바람처럼 그냥 홀연히 다가오는 거야. 선택하는지 안 하는지가 우리의 몫이라고 하지. 그러나 거부할 수 있다면 그건 어쩌면 사랑이 아닐지도 몰라. 그냥 바람일지도. (263쪽)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 생각을 하곤 했다. 그리고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시가닝 마모시키는 것은 비본질적인 것들이라는 것을. 진정한 사랑은 마모되지 않는다는 것을. 진정한 고통도 진정한 슬픔도 진정한 기쁨도, 시간은 모든 거짓된 것들을 사라지게 하고 빛바래게 하고 그중 진정한 것만을 남게 한다는 것을. 거꾸로 시간이 지나 잊힌다면 그것은 아마도 진정에 가 닿지 못한 모든 것이라는 것을. (278쪽)

"사랑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요. 사랑은 자기의 가장 연한 피부를 보여주는 것니까요. 사랑은 자기 약점을 감추지 않는 거니까요. 사랑은 상대가 어떻게 해도 내가 사랑하는 거니까요.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라고, 요한 신부가 그랬죠. 기꺼이 받아들여 봉헌한다고. 그 이후로 음, 그렇구나 상처 입겠구나 하고 시작하면 신기하게도 더는 상처 입지 않아요. 요한 수사님, 저는 그 이후로 매사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그리고 현재 나는 사랑합니다. 그게 전부예요." (2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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