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우리는 사라진 모든 것-제도, 가치, 금기, 이데올로기, 신념-이 계속 은밀히 살아가면서, 음험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고대의 신들이 기독교 시대에는 마귀의 형상을 취했듯이 말이다. 사라진 모든 것은 우리의 삶에 미세하게 스며들어 있기에, 흔히는 드러내 놓고 우리를 지배했던 권위보다 더 위험스럽다. 관용과 투명성의 우리 시대에, 금지와 통제, 불평등은 하나씩 사라진다. 그러나 그건 정신적 영역 속에서 더 잘 내재화되기 위한 것이다. (33쪽)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무제한의 기술 발전 덕분에 모든 것이 실재성의 과잉으로 인해 사라지게 되면, 인간이 자신의 극단적 가능성에까지 갈 수 있게 되면, 인간은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을 추방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살아 있는 존재의 속성은 자신의 가능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이지 않는 것이다. 반면 기술의 본질은, 전체에 대해, 그리고 전체에 반대하여 자신의 가능성들을 철저히 전개하고 불태우는 것이다. 그 전체 속에는 조만간 자신의 사라짐을 내포하고 있는 인간도 포함된다. 어떤 점에거 현실의 최고 단계인 완벽하게 객관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이 저항할 수 없는 과정의 최후에 이르면, 더 이상 그 세계를 바라볼 주체도 없고,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세계는 더 이상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우리의 재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게다가 더 이상 가능한 재현도 없다. (45쪽)
세상을 세밀하게 직관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세상의 의미와 외양들을 모두 헤아릴 능력이 없기 대문에, 그걸 보충하기 위해 시리즈적이고 디지털적인 이미지는 엄청난 자가 증식을 통해 그 공허를 채워 나간다. (71쪽)
모든 과학은 세사오가 인간 자신으로부터 인간의 멀어짐과 사라짐의 대가로만 만들어질 수 있다. 인간의 지식과 기술의 발전은 이렇게 인간적인 것의 제거, 인간이라는 주체의 제거, 그리고 물론 신의 제거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적인 것들의 사라짐과 함께 공허가 시작된다. 의미와 가치의 사라짐, 인간적 재현의 사라짐이 있고, 사라지면서만 탄생할 수 있는 객관적 현실, 그리고 인간이 있다. 존재는 사라짐이 없이는 생각될 수 없다. (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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