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귓속말 - 문학동네시인선 기념 자선 시집 문학동네 시인선 50
최승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3월
장바구니담기


말이 쏟아져나오던 시절과, 말이 사라지는 소리에 귀기울이는 시절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 되돌아갈 수 없었다. 두려웠고, 두렵기 때문에 비굴하게 늙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았지만, 때론 이 쓰기라는 직업은 하염없이 부질없어 나의 일상조차도 나락으로 떨어져버리게 했다. 부질없는 쓰기의 나날들이 이어질수록 나의 쓰기에는 단정(斷定)의 단어들이 많아진다. 단정의 단어들은 방어기제다. 나의 쓰기는 나를 무엇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김안 [내 쓰기의 운명]에서-58쪽

스스로의 힘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을 때, 우주선은 스윙바이(swingby)라는 우주 비행법을 이용한다고 한다. 스윙바위는 가고자 하는 행성이나 다른 행성의 중력을 이용한 우주 비행법이다. 이것은 갈릴레오호가 목성을 탐험할 때 실제로 사용한 비행법이기도 하다. 나는 최근 [스윙 스윙 그리고 스윙]이라는 시를 쓰며 갈릴레오호의 스윙바이와, 그만큼 느려진 행성의 속도에 대해 생각했다. 삶이나 시 모두, 스윙바이를 이용해 비행하는 우주선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갈릴레오호가 금성과 지구의 중력을 이용하여 목적지인 목성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과 시 역시 그런 악전고투의 연속일 것이다. -조동범 [스윙 스윙 그리고 스윙]에서-64쪽

잘 지냈나요?
나는 아직도 봄이면서 무럭무럭 늙고 있습니다.
그래요, 근래 '잘 늙는다'는 것에 대해 고민합니다.
달이 '지는' 것, 꽃이 '지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합니다.
왜 아름다운 것들은 이기는 편이 아니라 지는 편일까요.
잘 늙는다는 것은 잘 지는 것이겠지요.
- 윤진화 [안부]에서 -74쪽

아침 꽃을 저녁에 주울 수 있을까

왜 향기는 한순간 절정인지
아침에 떨어진 꽃잎을 저녁에 함께 줍는 일
그러나 우리는 같은 시가에 머물지 않고

- 이은규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에서-98쪽

희망이나 절망 없이, 다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얼마간 정신의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 - 이현승 [한 조각의 시를 위하여]에서-121쪽

눈이 아무리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해도 머리로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으니 '글자'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와의 관계도 그런 것이다. 차근차근 진행해야 할 순서를 항상 뒤엎는 것이 나의 선입견과 가정과 섣부른 판단이었다. 그것은 사고의 비만이 되어 순수한 시력을 가로막고 항상 잘못 보기, 엉터리 보기를 하고 마는 것이다. 상황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결국 내가 가진 생각의 시선으로 본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잘못 보기가 늘 잘못일까? 때로 그것은 결과가 썩 나쁘지 않을 때가 있으니
- 조말선 [기억의 비만]에서-140쪽

쓴다는 것은 '영원한 귓속말'이다. 없는 귀에 대고 귀가 뭉그러질 때가지 손목의 리듬으로 속삭이는 일이다. 완성은 없다. 가장 마음에 드는 높이까지 시와 함께 오르다, 아래로 떨어뜨리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박살은 갱생을 불러온다.
- 박연준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에서-144쪽

'매년'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니게 되면서, 기대하는 바도 많이 줄어 들었다. 거의 대부분 예상할 수 있는 일들이 벌어졌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조차 크게 놀라지 않았다. 나는 예민해지면서 동시에 둔감해지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묵묵히 하는 일들이 있다. 밥을 먹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 순간순간 찾아드는 슬픔을 가만히 끌어안는 일. 슬픔은 매일매일 반복되는 감정. 이럴 때일수록 저 슬픔에 맞서는 지속적인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열심히 밥을 먹고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앉아서 글을 쓰지만, 글을 쓰는 일은실은 온몸을 쓰는 일이다.
- 오은 [내년이 모여 매년이]에서
-19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