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라는 소유의 사회에서 무소유의 주장은 비현실 그 자체이다. 새로운 정보와 지식이 끊임없이 밀려오느 ㄴ정보사회에서 결코 디지컬화할 수 없는 '지혜'라는 이름의 고독한 깨달음이 설 자리는 없다. 무소유든 지혜든 그것의 결정적인 결함은 '상품'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상품이 못 되는 것은 팔리지 않고, 팔리지 않는 물건은 살아남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무소유와 지혜는 팔리지 않으면서도 살아남는다는 사실이다. 팔리지 않는다는 그 역설적 반시장 논리가 상품의 허상을 드러내면서 스스로 그 대척점에 선다. 무소유는 소유의 물질성을 제거하고 지혜는 반대물인 우직함으로 전화한다. 그것이 바로 변방의 지혜일 것이다.-13쪽
소유란 사람과 물건이 맺는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 내는 관계이다. 물건을 다른 사람의 접근으로부터 차단하는 격리와 고립이 소유이다. 더구나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 자체가 외딴 섬이 아니다. -14쪽
변방을 낙후되고 소멸해 가는 주변부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전위로 읽어 냄으로써 변방의 의미를 역전시키는 일이 과제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보다는 변방성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변방을 공간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부터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간적 의미의 변방이 아니라 담론 지형에서의 변방, 즉 주류 담론이 아닌 비판 담론, 대안 담론의 의미로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40쪽
직선과 속도라는 효율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고갯마루의 곡선과 주막 문화의 유장함은 아득한 변방 문화의 전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달라진 것은 더 이상 별리를 아파하지 않는 세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고시와 취업 시험 그리고 대학 입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있고, 그들을 뒷바라지하며 기다려 온 수많은 사람들 또한 그만큼의 좌절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부구하고 이제는 더 이상 박달과 금봉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74쪽
[임꺽정]의 탁월함은 그러한 계급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속하는 일체의 사회적 문맥 자체를 시원하게 뛰어넘는 곳에 있다고 할 것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삶, 그리고 그러한 삶에 담겨 있는 자유의지와 우정이 그것이다. 우정을 음모라고 했던 에피쿠로스의 말이 새삼 와 닿는다. 온몸으로 부딪치는 인간관계와 그런 인간관계가 엮어 내는 삶의 진정성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 [임꺽정]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86-87쪽
불가에서는 애초부터 세계를 분석하지 않는다.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깨달음이 지혜의 본질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정보사회에서는 정보의 양이 지식의 높이가 된다. 많이 쌓을수록 지혜가 커진다. 근대의 시작은 남의 지(知)를 내게 쌓을 수 있다는 신념의 출현과 함께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의 누적이 결국 혼란이 되고 홍수가 된다면, 그것을 지혜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것이 타자화하고 대상화하고 분석하는 일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럴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쌓고 소유하는 것으로 공부를 끝낸다. 공부란 깨달음이며 자기 변화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102쪽
변방과 중심은 결코 공간적 의미가 아니다. 낡은 것에 대한 냉철한 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이 변방성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한 결정적 전제는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부에 대한 환상과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결코 새로운 창조 공간이 될 수 없다. 중심부보다 더욱 완고한 아류로 낙후하게 될 뿐이다.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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