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초반부가 둘이 얼마나 똑같은지에 대해 열심히 감탄하며 보내는 시간이라면, 중반부는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야금야금 깨달아가는 시간이다. 급하게 몰아닥친 태풍은 어느새 그쳤고, 그 후에는 폭풍우가 쓸고 간 해변을 서서히 수습해가야 한다. -78쪽
어떤 관계에서든 더 많이 말하는 사람은 있다. 연인들은 필연적으로 역할을 선택해야 한다. 굿 스피커가 될 것인가 아니면 굿 리스너가 될 것인가. 말할 것인가. 들을 것인가. 던질 것인가. 받을 것인가. 그들이 서로에게 매혹된 원인은, 각각 상대방이 아주 훌륭한 청자聽者라고 믿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114쪽
민아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욕심인 줄 알면서도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누추한 방을 들키고 말았을 때 오래 부끄러워했을 연인의 마음자리, 그 한복판에 새겨진 흉터를 먼저 헤아려줄 수는 없었을까. 그러지 못했다면 혹시 사랑이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그 질문은 영원토록 봉인될 것이다. 과거의 여자를 향해 "나를 사랑하긴 했니?"라고 내 뱉는 어른은 없을 테니까. 그도 더이상 소년은 아니었다. -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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