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감정수업 - 스피노자와 함께 배우는 인간의 48가지 얼굴
강신주 지음 / 민음사 / 2013년 11월
장바구니담기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충고한다. 슬픔과 기쁨이라는 상이한 상태에 직면한다면, 슬픔을 주는 관계를 제거하고 기쁨을 주는 관계를 지키라고 말이다. 스피노자가 제안한 '감정의 윤리학'이 '기쁨의 윤리학'으로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0쪽

위기 상황에서 그는 번지점프를 하는 것처럼 몸을 던졌다면, 지금까지 그는 용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새로운 위기 상황,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과감하지 못하다면, 과거의 용기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용기와 비겁은 불변하는 성격과도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원래 비겁하거나 원래 대담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위기를 감내하려고 할 때에만 용기와 대담함은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가 번지점프대에 서는 것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앞으로 발을 내딛을지. 뒤로 물러날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 발을 내딛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사실뿐이다. -96쪽

한마디로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느낌. 혹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바로 당황이라는 감정의 정체다. 그러니까 당황의 감정은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사람일거야."라고 생각했던 나와 실제로 살아서 욕망하는 나 사이의 간극을 확인할 때 발생한다. 어쩌면 당황의 감정에 빠진 사람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당황의 감정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신. 혹은 자기의 맨얼굴을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가면의 욕망과 맨얼굴의 욕망이 우리 내면에서 격렬하게 충돌한다면, 당황의 감정에 사로잡힌 것이다. -158쪽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아한다면, 그 사람과 너무 떨어져 있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자꾸 그 사람의 학벌, 연봉, 가족 관계 등이 눈에 들어와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순간, 우리에게서 사랑이나 우정이라는 소망 가득한 관계는 조금씩 깨져 가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품에 꼭 안겨 있는 것이 낫다. 거리를 두고 보면 배가 나왔다거나 혹은 눈에 눈곱이 껴 있다거나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니까 말이다. -228쪽

서로 알고는 있지만 고백할 수 없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 마무리될 때, 어느 커플이든 그제야 애잔하게 이야기하지 않는가. 지금까지 고마웠다고, 나랑 함께 있어 주어서 감사하다고. 선생님과 제가 사이. 유부남과 유부녀 사이. 신부님과 여성도 사이. 스님과 여신도 사이에 싹튼 사랑은 모두 이렇게 감사의 감정으로 끝나는 거 아닌가. 이처럼 서로에게 친절하려고 할 때, 같은 말이지만 서로에게 감사할 때,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에 대해 일정 정도 거리를 두려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의 감정은 서러운 감정이다. -273쪽

말을 걸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하라!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이 함께 이야기할 만한 사람인지 확인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대화를 할 만한 사람이면 계속 이야기하면 되고,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과 헤어지면 된다. 식사도, 운동도, 여행도, 영화 관람도 모두 마찬가지다.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좋은 것은 다른 것이다. 섹스도 마찬가지다. 욕정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허락한다는 조건에서 기꺼이 섹스를 시도하라! 그 순간 우리는 그가 지속적으로 정사를 나누면서 그 외의 것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섹스는 사랑의 완성이나 결실이 아니다. 그건 단지 사랑이 시작되는, 혹은 사랑이 진척되는 한 가지 계기일 뿐이다. -338쪽

후회에서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정신적 태도, 다시 말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는 의식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고 믿는 것만큼 거대한 착각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큰 오만이 또 있을까? 결국 후회는 강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다. -394쪽

그렇지만 확신에는 어떤 흉터, 그러니까 의심을 품었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언제든지 이 상처는 다시 드러날 수 있고, 확신은 다시 저 멀리 물러나고 의심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확신과 의심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비극적 숙명에 서로묶여 있는 셈이다. 앞면이 보이면 뒷면은 보이지 않고, 뒷면이 보이면 앞면이 보이지 않는 모양새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에 대한 확신과 의심은 동시에 존재하는 법이다. -433쪽

우리를 배신하는 사람은 사실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자동차도 암벽도 그리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잘 알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자동차를, 암벽을, 그리고 어떤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그 대상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의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는 오만에 빠지는 순간, 그래서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오만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한때는 사랑받았던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다. "네가 정말 나를 안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 때문에 우리는 순간순간 변하는 자동차의 상태를 민감하게 읽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암벽의 상태를 제대로 점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또 애인의 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복수를 당할 수밖에. -458쪽

사람마다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다르고 동시에 좋음과 나쁨의 내용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우선 선과 악이라는 규범을 버리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단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삶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켜 준다면, 다시 말해 내 삶에 경쾌함을 준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삶을 향한 의지를 약화시켜 내 삶을 우울하고 무겁게 만든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좋다'고 느끼는 것을 선택하고, '나쁘다'고 느끼는 것을 거부하라! 나의 삶을 유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선택하고, 반대로 우울하게 만드는 것을 거부하라! 그것이 사람이든 일이든지 간에 상관없다...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감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진실을...지금 자신을 휘감고 있는 감정이 슬픈 것인지 아니면 기쁜 것인지 정확히 식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514-51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