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그늘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6월
구판절판


왜 늦게 알게 하는가. 다 지나가고 난 다음, 다시 회복시킬 수 없을 만큼 원형들을 망가뜨려놓고 난 뒤, 서로 손을 잡고 걸을 수 없게 된 뒤, 왜 그때야 알게 하는가. 이제 정을 주고 싶어도 정을 받을 수 있는 그녀들이 없다는 사실은, 집에 들어가고 싶어도 대문이 잠겨 골목에서 있어야 하는 거와 같았다. -72쪽

내가 너무 내 가까이 있기에 생긴 허물. 사람들은 그 신경질을 용케도 알아채고 내가 나에게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것을 권했던 것이다. 멀어진다는 것. 그녀와 내가 똑같이 봤던 속초에서의 그 바다를 그리워할 수 있는 건 그녀가 여기를 떠나 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그 바다를 잊어버린 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이상 생산의 의미가 아니라 해도 내가 태어난 집에 다녀오면 내가 순해질 수 있는 건 이제 그 집에서의 시간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 아닐는지. 남해바다 앞에서 새파란 추억 한 커트를 찾아낼 수 있었던 순간도 멀어졌기 때문에 다시 다가온 것이 아니었을는지. 멀어졌다가, 멀어졌다가 돌아와서야 그 가까웠던 것의 진실을 남들한테도 말해줄 수 있으리라. -151-152쪽

이제는 아주 조금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시간은 되풀이되지 않지만 지나가는 일도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사소한 일이라도 그들은 지나가며 생김새와 됨됨이를 새로 갖는다. 나에게 소설은 재생된 새 꼴들을 담아놓을 수 있는 공간이고 시간이다. 내가 어느 지점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었건 간에 그 지나간 것들은 오늘 여기까지로 오는 길이었으며, 여기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시간 또한 십 년이나 이십 년 뒤 짐작도 못 하겠는 그 시간들로 가는 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이제야 내 것으로 받아들인다. -171쪽

새로운 시간은 완전히 다른 시간 속에서 오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의 기쁨과 지금까지의 슬픔을 바탕으로 해서 온다. 아무리 새롭다고 해도 그 바탕 위해서 시작된다. -271쪽

희망 없는 사랑을 해본 사람. 사랑은 정상이 아니에요. 오죽하면 사랑에 빠진다고 했겠어요. 어느 날 정상이 되고 보면 내가 갑자기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그냥 여자. 당신도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그냥 남자. 그런데도 천국과 지옥이 동시에 왔다가 가고, 깊은 무덤이 되고, 노래가 되고.-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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