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창비시선 360
김용택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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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술은 식었다.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내가 사라진 너의 텅 빈 눈동자를
내 손등을 떠난 너의 손길을
다시 데려올 수 없다.
달 아래 누우면
너를 찾아 먼 길을 가는
발소리를 나는 들었다.
초저녁을 걷는 발소리를 따라
새벽까지
푸른 달빛 아래 개구리가 울고,
이슬 젖은 풀잎 위에서 작은 여치가 젖은 날개를 비비며 울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이 있다.
미련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마음은 떠났다.
봄이다.
봄이 온다.
새 풀잎이 돋아나기 전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 中--34쪽

매미가 운다.
움직이면 덥다.
새벽이면 닭도 운다.
하루가 긴 날이 있고
짧은 날이 있다.
사는 거싱 잠깐이다.
사는 일들이 헛짓이다 생각하면,
사는 일들이 하나하나 손꼽아 재미있다.
상처받지 않은 슬픈 영혼들도 있다 하니,
생이 한번뿐인 게 얼마나 다행인가.
숲 속에 웬일이냐, 개망초꽃이다.
때로 너를 생각하는 일이
하루종일이다.
내 곁에 앉은
주름진 네 손을 잡고
한 세우러 눈감았으면 하는 생각,
너 아니면 내 삶이 무엇으로 괴롭고
또 무슨 낙이 있을까.

-삶 中--46쪽

모든 것들은 끝을 향해 움직인다.
창밖 단풍나무 가지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매미가 우는 방향, 개구리들이 뛰는 방향,
내가 바라보는 방향, 모두
끝을 향해 있다.
마치 끝이 없다는 것을 알고나 있다는 듯이
개미들이 하루종일 커다란 단풍나무 위로 올라간다.
어머니는 가는귀가 먹은 지 오래다.
처음엔 슬펐으나, 이 나이에 보청해서 듣고 쓸 말이
얼마나 있겠느냐며 손사래를 치신다.
모든 것들이 끝을 향해 움직인다.
어머니의 하루는 점점 어두워지는 걸까.
밝아지는 걸까. 무심해지는 걸까.
어머니는 내가 밥을 달라고 하면 자꾸 뭐? 뭐라고?
지금 뭐라 하냐?고 물으신다.
마치 자기는 끝이 있다는 것을 정말로 알고 있다는 듯이
단풍나무는 사방으로 흔들리다가
천천히 그곳에 정지한다.

-모든 것들의 끝--64쪽

봄볕에 마르지 않을 슬픔도 있다.
노란 잔디 위 저 타는 봄볕, 무섭다. 그리워서
몇 굽이로 휘어진 길 끝에 있는 외딴집
방에 들지 못한 햇살이 마루 끝을 태운다.
집이 비니, 마당 끝에 머문 길이 끝없이 슬프구나.
쓰러져 깨진 장독 사이에 연보라색으로 제비꽃이 핀다.
집 나온 길이 먼 산굽이를 도는 강물까지 간다.
강물로 들어간 길은 강바닥에 가닿지 못해
강의 깊은 슬픔을 데리고 나오지 못한다.
봄볕에 마르지 않는 눈물도 있다.
바닥이 없는 슬픔이 있다더라.

-섬진강31 中--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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