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는 우리가 체험하는 삶의 단면들과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느끼는 자각, 감정, 이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깊이는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맺는 관계,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일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황홀한 경험이다. 스크린으로 상징되는 온갖 네트워크 도구들이 우리의 생산성을 높여 줄 것이라 기대하지만, 사실은 생산성을 높이는 데 꼭 필요한 집중력을 떨어트린다. -58쪽
대중교통이 무너지면 사람들이 죄 차를 몰고 도로로 나오니 교통체증이 늘고 이에 따라 휘발유 소비가 늘고 길에서 낭비하는 시간도 는다. 여유가 없다 보니 간단히 때우는 패스트푸드가 돈을 번다. 불규칙한 식사와 운동 부족은 건강 악화로 이어지고, 이는 병원과 제약사 매출 증대로 나타난다. 물론 추가로 소비한 연료비, 외식비, 병원비도 고스란히 GDP에 반영된다. 기반시설 부족이 국내총생산을 높이는 기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반면에 국민들은 지출이 늘어난 만큼 더 일을 해야 하고, 그럴수록 '소비 같지 않은 소비'는 더 늘어난다. 미국이 유럽 여러 나라보다 국내총생산은 더 높으면서도 삶의 질은 현저히 떨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108-109쪽
사회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회를 해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나부터 변해야 한다. -151쪽
마르크스의 글쓰기가 지닌 매혹은 바로 내가 이이 겪고 있으면서도 미처 그 정체를 알지 못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사유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해답을 제출하는 것보다 '질문을 발견해 내는 능력'이 진정한 창조성의 원천이다. 마르크스는 모두들 해결되었다고 느낀 곳에서 '또 다른 문제'를 찾아내고, 모두들 괜찮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결코 괜찮 않은' 문제를 찾아낸다.-180쪽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사는데도 우리는 왜 불행하다고 느끼는가? 우리의 '삶'과 '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이 책의 대답을 들어 보자. 슈마허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가 '나쁜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노동을 하는 목적을 세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필요하고 유용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서. 둘째, 자신의 재능을 잘 발휘하고 완성하기 위해서. 셋째,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협력하기 위해서. 이 세 가지가 노동의 목적인 이유는 인간의 가장 큰 욕구가 이것들과 깊이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구란 무엇인가? 슈머허의 견해는 이렇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서 무엇보다 '가치'에 관심을 갖는다. 이는 곧 도덕적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또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생명체에 관심을 갖는다. 이는 이웃과 동료를 섬기고 자연을 존중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개체로서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계발하는 데 큰 관심을 갖는다. 이 말은 힘과 책임감을 지닌 자율적 개인으로서 자신의 재능을 창조적으로 사용하고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가리킨다. -230쪽
인간이 지닌 이 세 가지의 근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노동이다. 동시에 노동을 통해 이런 욕구들을 배우기도 한다. 그러므로 '좋은 노동'이란 이런 노동의 목적과 인간의 욕구가 상호 작용하면서 삶이 고양되는 선순환 관계를 이룰 때 비로소 실현된다. 진정한 일의 즐거움이 없으면 삶의 행복도 없는 것이다. -231쪽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명료하게 구분하지 못하거나 단지 하기 싫은 일을 손쉽게 '감당할 수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리는 데 익숙한 '어른아이'(키덜트, kid와 adult의 조어)들은 그가 어떤 직업을 꿈꾸건 아직 직업을 가질 준비가 안 된 것이다. 소설가 은희경은 [비밀과 거짓말](문학동네, 2005)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장이란 자신이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을 지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위치한 보잘것없는 좌표를 읽게 되면 그때 비로소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년들은 일찍부터 자기라는 존재를 자각하지만 그것을 둘러산 시간과 공간을 만나기까지는 아직 어른이 아니다.소년이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한 가지 연료는 환멸이다.
그래서 자의식의 출발은 결핍이다.-300쪽
현대적 통증 모델은 뇌의 여러 부분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여 통증이 생긴다고 말한다. 통증은 단순한 신경 작용이 아니라 뇌의 의미 생성 부위에서 만들어 낸 경험이기도 하다. 그런데 뇌는 스스로 이 경험을 조절하지 못한다. 우리가 아름다운 것을 볼 때 빛이 망막의 막대세포와 원뿔세포를 자극하고 망막의 신경세포가 시신경을 통해서 전류를 뇌로 전달하는 과정은 알려져 있지만,뇌의 어느 부위에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지는 모른다. 통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통증의 생물학적인 기전은 알고 있지만 뇌의 어느 부위에 통증이 존재하는지는 모른다. 따라서 뇌의 어느 부분을 처치해야 만성 통증을 조절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현대 의학에는 항우울제.....수술, 최면.....침, 명상, 마사지 등 수십 가지 만성 통증 치료법이 있다. 매우 유감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많은 치료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제대로 된 치료법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문제는 뇌다. 뇌가 없으면 통증도 없다. 그러면 나도 없다. 걱정이다. 과연 통증이 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일생의 3분의 1을 매일같이 통증에 시달리면서 백스무 살까지 살아야 할까?-378-3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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