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병울 여행산문집 2
이병률 지음 / 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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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나이가 여든둘인지, 여든하나인지 잘 모른다고 말하며 웃습니다. 할머니의 나이를 물어서 잘 모른다고 대답했으니 할아버지 당신의 나이를 물었더라도 잘 모른다고 대답했겠지요. 살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아무것도 셈하지 않고, 무엇도 바라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 살다보면 사랑도 그렇게 완성될 겁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면서 이토록 힘이 드는 건, 행복을 바라기보다 맨 앞에다 자꾸 사랑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6#쪽

11월과 12월 사이를 좋아합니다. 그건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조금씩 눈비가 뿌리고 있으니 어쩌면 잠시 후에 눈송이로 바뀌어 이 저녁을 온통 하얗게 뒤덮을지도 모르니 이곳 강변의 여관에 자고 가기로 합니다. 창문을 열어놓고 맥주를 한 병 마시는데 몸이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네요. 이야기할 사람이 없으면 술을 마시지 말라고 몸이 말을 걸어 옵니다. 그럼요. 술은 정말정말 좋은 사람이랑 같이 하지 않으면 그냥 물이지요. 수돗물.-11#쪽

말 한마디가 오래 남을 때가 있다. 다른 사람 귀에는 아무 말도 아니게 들릴 수 있을 텐데 뱅그르 뱅그르 내 마음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말, 한마디 말일 뿐인데 진동이 센 말, 그 말이 나를 뚫고 지나가 내 뒤편의 나무에 가서 꽂힐 것 같은 말이, "만약 네가 원한다면 우리 집에서 지내도 좋아." 왜 그 말을 들으며 활짝 웃지 못하고 힘들었는지. 나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어서였을까. 그저 아주 넓은 판자 위에 나는 누워 있고 그 나무판자가 강물이 내는 속도에 몸에 맡겨 흘러가고 있다는 기분을 느낄 뿐. 왜 말은 바람이 되고 물살이 되는가. "우산 가져왔어요?" 그날 밤은 나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잠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말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말, 모두다 빗물에 씻겨도 씻겨 떠내려가지 않을 당신, 그 무렵 그 말이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를 당신에게 말하지 못했다. -27#쪽

케냐 초원에는 '누'라는 동물이 산다. 주로 떼를 지어 서식하는 초식동물이다. 케냐 나이바샤의 크레센토 섬에서 사파리를 할 때였다. 사파리를 안내하면서 이런저런 동물들에 관래 이야기를 들려주던 레인저가 저 멀리 나무 뒤로 누가 나타나자 피식,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그러냐고 물었다. "누, 쟤들 정말 웃겨서, 아무런 일도 없는데 어떨 때는 갑자기 전속력을 다해서 마구 달려. 그러다 엄청난 먼지를 일으키면서 갑자기 급정거를 하지. 무슨 큰일이 일어난 것처럼. 그러고는 자기 자리로 조용히 걸어서 돌아와. 그게 다야. 진짜 웃기지 않아?" 이 친구는 동물의 그런 행동을 보고 바보 같다, 멍청하다 하지만 그것도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자기만의 시간을 사용할 줄 아는 거라 생각하기로 한다. 열정을 다해 끝까지 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연습을 하면서, 전속력을 다해 하고 싶은 것 가까이 갔다가 아무 결과를 껴안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연습을 하면서 우리도 살고 있지 않은가. 오늘 하루도, 내일 하루도 아니 어쩌면 우린 영원히 그 연습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모른다. -34#쪽

당신한테 내가 어떤 사람이었으면 하는가요?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그러네요.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의 '상태'를 자꾸자꾸 신경 쓰게 되는 것.
문든 갑자기 찾아오는 거드라구요. 가슴에 쿵 하고 돌 하나를 얹은 기분. 절대로 나는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그렇게 되는 거예요.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와 있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날씨처럼, 문득 기분이 달라지는 것. 갑자기 눈가가 뿌예지는 것.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는 것.-39#쪽

사는 데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지만 그것을 알기에 사랑은 얼마나 보이지 않으며 얼마나 만질 수 없으며 또 얼마나 지나치는가.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고 지나치는 한 사랑은 없다. 당장 오지 않는 것은 영원히 오지 않는 이치다. 당장 없는 것은 영원히 없을 수도 있으므로. 그렇더라도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는 말라. 사랑은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불안해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믿으려는 것이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걸 못 견뎌하는 것이다. 사랑이 변했다, 고 믿는 건 익숙함조차 오래 유지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있다. 사랑이 없다면 세상도 없는 것이며 나도 이 세상에 오지 않은 것이며 결국 살고 있는 것도 아니질 않는가. 그렇다고 사랑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지도 말라. 사랑은 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 사랑할 때의 행복을 밖으로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상태가 사람을 키운다. 애써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넘치는 상태만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47#쪽

나이 든다는 것은 넓이를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넓이를 어떻게 채우는 일이냐의 문제일 텐데 나이로 인해 약자가 되거나 나이로 인해 쓸쓸호 몰리기는 싫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들어도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문장처럼 늘 이 정도로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나의 퇴락은 어쩔 수 없겠으나 세상에 대한 갈증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보는 것에 대한 허기와, 느끼는 것에 대한 가난으로 늘 내 자신을 볶아칠 것만 같습니다.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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