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유목 문화권에서는 지팡이로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일이 끝나지만 농경 문화권에선 그것은 일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농사는 말이나 머리로 짓는 게 아니기 때문에 "농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대로 몸을 직접 움직여야 한다. 그러면 심은 대로 싹이 트고 가꾼 대로 자라서 어김없이 그 노고에 보답한다. 그래서 농경 문화권에선 몸을 움직이지 않고 말만 앞세우는 사람을 멀리했다. 농경 문화권에서는 생존의 열쇠가 자기 자신에게 있기에 자기와의 끊임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 그것이 대부분의 것들이 바깥에서 주어지는 유목 문화권과는 다른 점이다. -98쪽
부동의, 고정된 존재가 히브리 인들에게 있어서는 무無임을 가르쳐 준다. 그들에게는 어떤 활동적인 것, 움직이는 것과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어떤 존재만이 실재이다. -148쪽
삶의 의미는 남이 건더기만 건져서 마치 브리핑하듯이 내게 전해 준다고 해서, 또 알맹이를 농축시켜 알약으로 만들어 내 입 안으로 쏙 넣어 준다고 해서 내것이 되는 것이 아니여서 뜸이 필요한 것이다. 벼가 자라서 익기까지에는 몇 달의 시간이 걸리고, 누룩이 술로 바뀌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하듯,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깨닫는 데에도 얼마간의 시간을 지불해야 한다. 그것이 내적 성숙이고 자기 완성이다. -198쪽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외부로부터 조달하거나 공급받는 빵 문화권에선 전진해야 한다. 하지만 밥 문화권에선 자신의 내부로부터 구해야 하기 때문에 농경민들은 누가 시킨다고 일을 하진 않는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아서 하고, 생존의 열쇠는 자기 자신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곳에서 사계절의 변화를 경험해야 하기 때문에 변화하는 자연의 리듬에 자기를 맞출 수밖에 없다. 그게 농부의 일이고 길이다.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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