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문제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죄는 미워할지라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된다"며 점잖은 충고를 하기도 한다. 나아가 "지금에 와서 문제를 제기하면 자칫 사회적 갈등으로 비화될 수도 있으니 용서하는 것은 어떨까"라고도 한다. "예술가의 위대함은 그것이 선의든 악이든 해당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있다"고 설파한 드골의 전후 프랑스. 그들은 해방 직후 다른 어떤 분야보다 해악이 크다는 이유로 나치스에 부역한 예술가들을 말끔히 청산하지 않았던가. 물론 4년여의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나치스 지배를 받은 프랑스와 40년에 가까운 지배를 받은 한국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애초부터 용서나 화해라는 것은 진실규명과 반성이 있은 후에야 가능한 것이지 무턱대고 용서부터 하고 보자는 생각은 불순하다. -72쪽
해방의 그날까지는 항일의병과 항이지사를 잡아 가둬 일제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보루였고, 독재가 판치는 시절에는 정권의 안녕을 위해 기능한 서대문 형무소. 그러나 지금의 서대문 형무소는 '일제'대 한민족'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대결 구도를 전제로 모든 것이 꾸며져 있다. 우리 안의 여러 모순은 등한시한 채 극우적 민족주의와 반민중적 국가주의를 부추기는 데에만 집중해 복원된 것이다. 내키는 내키지 않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남아야 한다. 단순히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나머지 절반'도 기록해야 마땅하다. 제국주의와 독재체제의 잔혹함과 위험성을 알리는 곳으로서,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개인의 자유를 박탈한 세력 전반에 대한 민중의 투쟁을 기억하는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해야 하는 것이다. '외부'에 대한 집단적 불만표출을 통해 '내부'의 문제를 감추고 있는 서대문 형무소. 그 금기를 깨는 것이 바로 서대문 형무소 80년의 역사를 올바로 보듬는 길이다. -170-172쪽
독립문이 탄생한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국의 전통적 종주국 지위를 무력화하기 위해 조선의 독립 운운한 것이었다. 그리고 독립협회 인사들도 청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정녕 조선을 위한 일이라는 일본의 생각을 별다른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이렇게 독립문의 '독립'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종속되기 위해 청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사대의 상징을 헐고 '또 다른 사대의 상징'을 세운 셈이다. -181쪽
말하자면, 국가의 명령을 따르다 죽은 이들을 무조건 '아름다운 죽음'으로 호도하고 숭배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언젠가 또 국가나 민족의 이름으로 애꿎은 희생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장래에의 다짐과 같다. 앞으로 있을 국가 동원에 대해 미리부터 '국가를 위한 희생은 위대하다'는 이데올로기를 심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얼핏 보기에는 '과거의' 순국선열을 기리기 위한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미래의' 국가 동원을 위한 무시무시한 논리가 숨어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의 관리 주체가 국방부라는 데서 그 사실은 명확해진다. 군인 유해 발굴단은 상시 운영하면서도 정작 충북 영동 노근리와 경남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전남 나주와 함평에서, 제주의 이름 모를 오름들 사이에서 떠도는 '학살당한 영혼'은 보듬지 않는 국가. 시도 때도 없이 국가와 민족을 강조해대는 우리의 현실이 그래서 더 무섭다. -195쪽
언제부터인가 '기억상실'이 당연시되는 우리 사회. 어두운 역사라는 것은 덮어버린다고 해서 잊혀지는 게 아니다. 부끄럽고 슬픈 역사도 분명 우리의 역사다.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이유는 그러한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25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