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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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달리는 일" 사이에는 그처럼 서서히 권태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거기에는 지불한 만큼의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는 실망감이 있었고, 열려 있어야 할 문이 어느 사이에 닫혀버린 듯한 폐쇄감이 있었다. 그것을 나는 '러너스 블루(주자의 우울)'라고 이름 붙였다.-29쪽

달리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비슷하다. 여러 가지 형태의 여러 가지 크기의 구름. 그것들은 왔다가 사라져간다. 그렇지만 하늘은 어디까지나 하늘 그대로 있다. 구름은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그것은 스쳐 지나서 사라져갈 뿐이다. 그리고 하늘만이 남는다. 하늘이란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체인 동시에 실체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넓고 아득한 그릇이 존재하는 모습을 그저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37쪽

근육이라는 것도 살아 있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가능하면 힘 안 들이고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무거운 짐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심하고 기억을 지워 나간다. 그리고 일단 해제된 기억을 다시 입력할 경우에는, 또 한 번 같은 과정을 처음부터 되풀이해야 한다. 물론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유는 필요하다. 그러나 레이스를 눈앞에 둔 이 중요한 시기에는, 근육에게 착실히 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다. "이건 말이야. 애들 장난이 아니야"라고 하는 명확한 메시지를 상대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펑크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흔들림 없는 긴장 관계를 유지해두어야 한다. -104쪽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128쪽

수면은 나날이 미묘하게 변화하고, 색이나 파도의 형태나 유속이 변해간다. 그리고 계절은 강을 둘러싼 식물과 동물들의 모습을 확실하게 변모시켜 간다. 여러 크기의, 여러 모양의 구름이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났다가는 사라져가고, 강은 햇살을 받아서 그 하얀 구름이 오가는 것을 어느 때는 선명하게,어느 때는 애매하게 수면에 비춘다. 계절에 따라서, 마치 스위치를 전환하는 것처럼 바람의 방향이 변화한다. 그 살결에 닿는 감촉과 향기와 방향으로 우리는 계절의 추이를 명확하게 감지할 수 있다. 그런 실감을 동반한 흐름 속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가 자연의 거대한 모자이크 속의 미세한 하나의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바다를 향해 흘러가다 다리 밑을 지나는 강물처럼 교환 가능한 자연현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140쪽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불안감은 떨쳐낼 수 없다. 한 순간 내 눈앞을 스쳐간 검은 그림자는 정말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것은 지금도 이 몸속 어딘가에 잠복해 있으면서 빈틈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닐까? 큰 저택에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기고 숨죽인 채, 집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잠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교활한 도둑처럼. 나는 내 몸의 내부를 눈을 부릅뜨고 들여다본다. 거기에 있을지도 모르는 무엇인가의 모습을 확인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미로인 것처럼 우리의 몸 역시 또 하나의 미로인 것이다. 도처에 어둠이 있고, 도처에 사각死角이 있다. 도처에 무언의 암시가 있고, 도처에 이중성이 기다리고 있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경험과 본능뿐이다. -202쪽

왜냐하면 "러너가 되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누군가의 부탁으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햇던 것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소설가가 되어주세요"라는 부탁을 받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닌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가 좋아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좋아서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말려도, 모질게 비난을 받아도 내 방식을 변경한 일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누구를 향해서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228쪽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에는 친절한 마음의 편린 같은 것이 보일까?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 태평양 상공에 덩그러니 떠 있는 무심한 여름 구름이 보일 뿐이다. 그것은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구름은 언제나 말이 없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하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시선을 향해야만 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안쪽인 것이다. 나는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린다. 깊은 우물의 바닥을 보는 것처럼. 거기에는 친절한 마음이 보일까? 아니,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같은 나의 성격일 뿐이다. 개인적이고, 완고하고, 협조성이 결여된, 때로 자기 멋대로인, 그래도 자신을 항상 의심하며,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거기에 우스꽝스러운-또는 우스꽝스러움과 비슷한-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나의 본성이다. 낡은 보스턴백처럼 그것을 둘러메고, 나는 긴 여정을 걸어온 것이다. 좋아서 짊어지고 온 것은 아니다. 내용에 비해 너무 무겁고, 겉모습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군데군데 터진 곳도 보인다. 하지만 그것 외에는 짊어지고 갈 것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메고 온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애착도 간다. 물론.-229쪽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그렇다, 아마도 이쪽이 좀 더 적절한 표현일것이다).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258-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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