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우리 현실에서 책은 헌 신발짝 값만도 못하다. 중고 서적은 대체로 무게로 저울에 달아 유통된다. 출판인이나 저자 편에서는 국민 수준이 낮다고 하고, 국민은 책이 제값을 못한다고 의심한다. 아무튼 도서의 하향 평준화는 분명하다. 수많은 시간과 지성을 쏟은 저자나 역자의 책이든, 시정잡배가 대필시켜 쓴 책이든 종이 값이나 쪽수로서 정가를 맞춘다. 지성과 정신노동의 가치를 이렇게 경시하고 저평가하는 사회에서 사상의 향기는 커녕 타인의 생각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도야하며, 바람직한 인내심 같은 것을 키룰 여지란 기대하기 어렵다. 큰소리치는 사람이 이기는 법이니, 시적인 표현을 제외하면 아예 상스러운 고함조차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읽어야 하는 소리 없는 대화로서 독서의 미덕을 누가 옹호할까?- 66쪽
독서 운동은 추상적인 구호로 해결되지 않는다. 자유로운 사상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 책을 아끼듯이. 책방이 곁에 없는데 어디서 책을 구할 것인가. 대도시 중심가, 쇼핑센터에 가서 책을 찾는 것과 동네에서 책을 접하는 것은 다르다. 아침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뒤적이며 하루를 시작하듯이. 방과 후나 일을 끝낸 오후에는 서점에 들르는 게 일상이어야 한다. 누가 너절한 잡지와 참고서만 그득한 동네 서점에서 문화를 운운하겠는가. 담배 가게나 빵집이나 카페처럼 책방 또한 우리 곁에 가까이 있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76쪽
우리에게 소수에 대한 무관심과 무시는 이미 중병 수준이다. 모든 분야의 구석마다 배가 부른 주류의 이미지가 중심이다. 급하게 건너뛰는 현대화의 큰 폐해를 생각해 보면 기적을 일으킨 한강 물에 쓸려 보낸 소중한 기술이며 여전히 살아서 사랑받을 수 있었을 기법은 또 얼마나 많은가! 지난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눈부시게 도약했던 흑백사진 복제술 덕분에 기념비적인 도판을 곁들인 양장본과 반양장본도 쏟아졌었다. 이런 훌륭한 도판이 세련될 틈도 없이 금세 컬러 도판만이 통용되었으니 이런 징검다리 사이로 빠져나간 다른 역사적 경험이 어디 하나 둘일까.-104쪽
그런데 우리 서점에 그를 다룬 책이 상당하지만 수백 권도 넘는 빈센트의 책자 가운데 정말 읽을 만한 것은 몇 권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은 놀랍다. 무수한 전기와 미학서와 역사서 가운데 어떻게 가장 비중있는 것들은 싹 걸러지고 나머지 책들만 번역될 수 있었을까? 최근의 책들은 그의 생시나 사후 얼마 되지 않아 출간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로망'으로 채색되었고, 무수한 겹치기 인용 때문에 미지근하다. 그의 편지와 일기만 제외하고 주목할 만한 것이거나 훌륭하기에 그만큼 저작권이 높은 것은 거의 제외된 셈이다. 이런 을씨년스러운 결과와 태연한 풍조가 왜 빚어졌을까. 이런 출판의 향방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인기 뒤에 숨은 삼류 멜로와 권위라는 말에 가려진 진정한 탐구자의 언어를 어떻게 해야 되찾을 수 있을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결코 아니고, 그런 조바심이나 거저 얻으려는 초조한 허영심이 없는 독자가 늘어났을 때가 와야 하지 않을까. 세상사에서 알아보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수천 년부터 혀를 내둘렀던 사람도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185-186쪽
칼이 아니라 펜을 놀려 싸우는 평화로운 전쟁터는 지성과 감성이 다투는 터전이다. 거기에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주장하느라고 무리수를 두었던 애국적 필자들은 이제 인기가 시들하다. 교과서적인 명성을 날리던 저술도 죽을 쑤고 있다. 한때 박식한 사가들은 위증을 위한 증거 자료처럼 방대한 책을 써냈고, 이런 책들은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다국어로 번역되곤 했다. 그런데도 한 세기도 안 된 지금은 헐값에도 찾는 사람이 없이 비만증에 걸려 병상에 누운 거물처럼 서가에 처밖혀 있다. -208쪽
마을 아래로 흐르는 와이강江을 바라보면서 성채 주변에서 좌우로, 지그재그로 펼쳐지는 골목으로 한두 집은 서점, 그다음은 옷가게나 상점, 그다음 집은 '펍', 그다음은 '비 엔 비' 민박집, 그 이웃은 다시 서점....... 그런 식이다. 이렇게 반경 200여 미터 안에 서른 군데 가까운 서점이 빼곡하다. -282쪽
요크셔 테일스에서 컴브리아로 접어드는 산길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 엔디미온이 영원히 잠든 '달의 계곡'처럼 오전인데도 짙은 안개 속에 여전히 달빛이 교교하다. 어지럽게 굽이치며 돌아 내려가는 길가의 언덕은 제주도의 오름이 바람에 실려와 이곳에 내려앉기라도 한 듯 다소곳하다. 길을 따라 가다보니 랠프 윌도 에머슨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것도 멀리 있는 것보다 아름다움과 놀라움이 적지 않다는 데에 놀란다. 가까운 것이 먼 것을 해명한다. 물방울은 작은 바다이다. 한 사람 속에 모든 자연이 들어 있다."-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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