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 루나파크 : 훌쩍 런던에서 살기
홍인혜 지음 / 달 / 2011년 9월
구판절판


언제나 이렇다. 내 책상은 늘 현실안주로 뒤덮여 있고, 내 가방은 집착으로 가득 차 있다. 언제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는커녕, 짐 더미에 묶여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29쪽

차별하지 않고, 타자화하지 않고, 없는 사람인 양 모르는 척하지 않고, 그저 '보통 사람'의 범주에 모두가 속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자기를 드러내며 한길을 자유로이 다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121쪽

장기여행의 좋은 점은 어딘가로 향할 때 시간에 대한 초조함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월요일에 못 가면 화요일에 가면 되고, 수요일에 문 닫은 곳은 목요일에 찾으면 된다. 죽어도 오늘 가봐야 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몇시까지 가지 않으면 큰일나는 것도 아니다. 어딘가로 가려고 최단 루트를 찾으려 애쓸 필요도 없고, 돌아 돌아 가도 가는 길 자체가 속 편한 여행길이다. 차가 막혀 수십 분째 껌처럼 길바닥에 붙어 있어도 좀처럼 시계를 보지 않는다. -158쪽

'모든 것을 날씨처럼 생각하기'는 큰 효험이 있어서, 여행 기간 내내 큰 힘이 되어주었다. 심란한 일이 생겨도 그저 어쩌다 맞이한 흐린 날인 거고, 문제가 발생해도 그저 소나기일 뿐이었다. 숱한 문제가 생겨도 예전처럼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그저 적당히 떨어져서 보는 여유를 얻었다. 문젯거리를 늘 보물처럼 끌어나고 소일 삼아 걱정하던 내가 그 모든 트러블을 슬며시 내려놓는 사람이 된 것이다. 언제 다시 도질지 모르는 '안달병'이지만, 이런 회복 가능성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190쪽

내 취향이 아니면 그저 무관심하면 그만인 것을, 일일이 주의를 기울이고 하나하나 짚어가며 험담까지 했다니 그야말로 유치한 행태였다. 단지 토를 달기 위해 관심을 두고 그에 몰두하다니 모순적인 '싫음'이었다. 뭔가를 싫어하며 마치 자신이 미욱한 대중과는 취향의 수준이 전혀 다른 고상한 사람인 양 착각했다니 얼마나 우스운가. 실제로는 나라는 존재에 자신이 없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두려웠기에 남을 '까면서'존재감을 확립했던 거다. 어떤 창작인이라도 나보다 노련하고, 나보다 노력해온 사람이라는 걸 인정했어야 했는데 어설픈 식견으로 그를 무시하고 비판하며 내가 그 사람보다 잘난 것같은 희열을 맛봤던 거다. -267-268쪽

불친절은 그저 불친절, 가해자의 품성을 탓하면 되는 일이지 내 처지를 반추하며 하루를 망칠 이유가 없다. 여행에서의 보석 같은 하루를 그렇게 허비하기엔 너무나 아까우니까. 작은 불친절에도 쉽게 마음이 쪼글쪼글해지는 나 같은 사람들이 모두 씩씩하게 마음을 슥슥 다려서 다시 매끈한 기분으로 여행했으면 하고 바라본다.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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